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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정조대왕의 정신

정조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면서 불평등관계에 있는 하층민의 소외정책을 개선하고 인권을 보호하려는 생각을 갖고 그에 따른 정책을 추진하였다.
아울러 기득권층의 특권을 분산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이는 양반사대부 중심의 사회에서 '민국(民國)'의 주체인 백성중심의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근대의식이 정조에게 있었던 것이고 정조는 백성들의 지지 기반으로 노론 위주의 기득권층을 압박하여 조선의 변화를 추진하였다. "나는 평생 미천한 마부에게조차 이놈 저놈 해본 적이 없다" 이와 같은 '민국'을 추진한 정조는 기본적으로 인간 존중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정조는 "나는 평생 미천한 마부에게조차 이놈 저놈 해본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조차 하대하지 않고 그를 존중한 것이 바로 정조의 정신이었다. 이러한 인간존중의 정신이 정조의 개혁정책에 바탕이 되었다.

노비추쇄관제도와 서얼제도를 철폐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겠느냐?"

정조는 즉위 후 노비추쇄관 제도를 철폐하고 조선 역사상 최악의 법으로 평가받는 서얼제도를 철폐하였다. 이는 노비들에 대하여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겠느냐? 이 세상에 노비보다 슬픈 존재는 없다. 고로 마땅히 노비는 혁파되어야 한다."라며 노비제도의 철폐를 생각하였다. 그 전단계로 도망간 노비들을 쫓아가 잡아오는 노비추쇄관 제도를 없애버린 것이다.
서얼 제도의 전면 철폐 역시 정조의 인간존중 정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조는 "서얼의 제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확고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영조시대에 서얼 제도 혁파에 대한 기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를 정조가 실현한 것이다. 정조는 자신이 서얼제도를 철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에서 적서 차별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강력하게 시정하게 하였다.

자휼전칙(字恤典則)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구휼"

정조는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천재지변 등으로 인하여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구휼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인식했다. 정조시대 이전에는 민간에서 수양하는 것이 원칙으로 인정되었지만 정조는 유기아(遺棄兒)나 행걸아(行乞兒)의 구제에 있어서 국가가 보호하고 책임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정조의 인식 속에 제정된 것이 바로 '자휼전칙(字恤典則)'이다.
자휼전칙은 흉년을 당하여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걸식하거나 버림받아 굶주림으로 이들이 부모나 친척 등 의지할 곳을 찾을 때까지 조정과 지방 관아에서 구호하고 또 자녀나 심부름꾼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양하게 하였다. 정조는 윤음과 함께 조례를 정하여 국한문으로 인쇄하여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반포하여 영구히 시행하도록 하였다.

문(文)과 무(武)의 균형발전

정조는 균형과 조화를 특히 중시하였다. 문치규장 무설장용(文致奎章 武設壯勇)이라고 하며 학문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고, 무예를 육성하기 위하여 장용영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는 정조가 늘 강조한 균형의 실현이었다. 정조는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아가고, 수레가 양 바퀴로 움직이듯이 문과 무는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균형론이다.

백성계몽을 위한 훈민정음 활성화

정조는 모든 백성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기회균등의 정신이야말로 정조의 핵심 정신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백성들을 똑똑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정조는 훈민정음(한글) 활성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한글 보급운동이고 당시 상황으로 이야기하면 훈민정음을 통한 국가 정책 홍보였다. 예전에 국왕이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타이르거나 당부하는 말씀을 '윤음(綸音)'이라하였는데, 정조 이전시기까지 윤음을 반포할 때 한문으로 작성된 것만을 반포하였다. 허니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조는 윤음과 법령을 반포할 때 한 쪽 면에 훈민정음으로 써서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읽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가가 편찬하는 거의 대부분의 서적들을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발간하여 백성들의 지식수준을 높이고, 무예 서적들을 언해본으로 동시 출간하여 평민 무사들이 무과에 합격하여 대거 새로운 무반층으로 형성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훈민정음 보급 정책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기층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효(孝)

정조는 효의 정신을 실천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스스로 조부인 영조, 부모인 사도세자와 혜경궁에 대한 효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효의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부모은중경과 오륜행실도를 간행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위민과 개혁이 담긴 정조의 좌우명
첫째입지(立志)
뜻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목표를 정하여 나아가는 것이고 기(氣)를 통솔하는 것으로, 모든 근간(根幹)이 되는 것이다. 그 뜻이 있은 연후에야 그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지를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둘째이치
세상의 모든 만물에 대한 이치를 밝히는 것이 바로 군주가 해야할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셋째거경(居敬)
공자가 말하기를, '경(敬)으로 자신의 행동을 연마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 하였고, 자사(子思)는 말하기를, '공경을 돈독히 하면 천하가 태평하여진다.' 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학문과 역사 즉 세상에 대한 공경을 높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넷째하늘(天)
하늘은 그것이 바로 도(道)인데, 중정(中正)하고 순수(純粹)한 것이 하늘의 도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역경(易經)》의 '하늘의 운행은 꾸준한 것이므로 군자(君子)가 이를 본받아 쉬지 않고 스스로 노력한다.'고 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하늘을 본받는 것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다섯째간언(諫言)
정조는 간언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다스리고 천하의 선한 말을 나오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즉《상서(商書)》에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간언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여섯째학교(學校)
학교를 다시 일으켜 백성을 똑똑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백성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일곱째인재(人材)
아무리 국왕이 총명하고 국정운영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인재 육성의 중요성과 훈련된 그들을 기용하여 나라를 위해 쓰는 것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여덟째애민(愛民)
국왕은 곧 백성의 부모이니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마지막검소(儉素)
정조는 《역경(易經)》의 '절제에 의거 법도를 만들어서 재화(財貨)를 낭비하지 않으며 백성을 해치지도 않는다.' 는 말과 '사치로 인한 폐해가 천재(天災)보다도 더 심하다.'는 말의 의미를 늘 가슴 깊이 생각하고 검소함을 추구하였다. 그가 무명옷을 입은 군주, 반찬 5가지 이상을 먹지 않은 군주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검소함을 숭상해야 한다는 좌우명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손상익하(損上益下) 그리고 대동(大同)사회

"이것이 곧 대동(大同)이라는 것으로, 이는 홍범(洪範)에 이른바 '자신은 안락해지고 자손들은 좋은 일을 만날 것이다.'는 것이다."

정조는 늘 '손상익하(損上益下)'를 강조하였다. 바로 이익은 아랫사람이 누리고, 손해는 윗사람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가! 요즘 우리 사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곧 부유하고 지위 있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많은 사회는 문화로 풍요로운 사회요, 그것이 없는 사회는 참으로 불행한 사회이다. 정조는 이미 200여 년 전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씀하셨고 그것을 세상에 실천하였다. 이러한 세상을 정조대왕은 '대동(大同)'이라고 하였다.
즉위 24년인 1800년 새해 첫날 백성들에게 관리들과 백성들이 함께 의논하고 따르면서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것이 곧 대동(大同)이라는 것으로, 이는 홍범(洪範)에 이른바 '자신은 안락해지고 자손들은 좋은 일을 만날 것이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우리가 요즘 이야기하는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가 곧 정조가 이야기한 '대동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