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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동칼럼] <세계문화유산 華城 바로알기 5> - 화성편액扁額의 금석학적 고찰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1-07-19
조회수
762

<세계문화유산 華城바로알기> 5


 화성편액扁額의 금석학적 고찰 


김훈동(재단이사)


 수원화성이 축성된 지 220년이 됐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5.74km에 스며있는 예술의 숨결을 읽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글씨 예술의 백미인 편액扁額을 통해 조선후기 문화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정조시대 역사를 음미하는 일은 자못 뜻이 깊다. 편액을 현판懸板이라고도 한다. 편액은 건축물에 거는 주로 가로로 된 긴 액자를 말한다. 편액은 옛 건물에 달려있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문화재의 얼굴이다. 간결한 언어의 선택을 통하여 옛 선현들이 추구한 건축물의 내면적 세계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건물의 명칭을 새겨 걸어놓아 문패와 같은 역할을 한다. 편액의 글씨는 한 서가書家의 서법書法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임금의 글씨를 새겨서 걸어놓는데 이것을 ‘어필御筆’이라는 글자를 표기하여 더욱 엄격히 관리하였다. 목판의 각자刻字일지라도 아직도 묵향墨香이 풍겨 나오는 듯하다. 화성에 있는 편액에 담긴 뜻을 알아보자.



< 장안문 >

 화성 4대문의 하나로 북쪽대문이다. 장안문이란 이름은 정조가 정하였고 당대의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이 썼다. 장안이라는 말은 중국의 주나라 이후 여러 나라들의 수도였으며 장안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중국 명나라 때이며 북경 자금성 천안문 앞 좌우에도 장안좌문 과 장안우문이 있어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편액은 수원시청에 근무한 소형 양근웅이 쓴 해서楷書로 준일함이 보인다.



< 화홍문 >

 북수문인데 방화수류정 서쪽 44보 거리에 있고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글자인데 용의 수컷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이 수문을 통과 하면서 무지개 현상을 빚어내고 또 수문 밖의 용연과 관련하여 화홍문이라 한듯하다. 편액은 당대 예서隸書의 명필 기원 유한지에게 쓰게 했는데 예서 필획이 용솟음치는 감흥을 흠뻑 주는 보기 드문 예서체다.



< 방화수류정 >

 용연龍淵 옆 용두바위 위에 터를 잡아 각루角樓를 설치하였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려하고 우아한 정자이기도 한 이곳은 팔달산 서장대, 장안문과 동장대 그리고 광교산과 관악산 등 화성의 주요 부분까지 조망할 수 있고 아울러 풍광의 조화를 즐길 수 있는 요지이다.
편액은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는 뜻의 방화수류정이라 하여 당대의 명필 송하 조윤형이 썼으나 없어지고 1956년 원곡 김기승이 쓴 행서체行書體로 송나라 황산곡 서체의 훈향을 느낄 수 있다.



< 연무대 >

 동장대라 하는데 화성의 동북쪽 창룡문과 마주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 동쪽방면의 군사 지휘소이면서 동시에 군사훈련장으로 편액을 연무대라 하였다. 정조대왕의 글씨에서 집자集子하여 걸려있는데 자간字間이 맞지 않아 매우 아쉽다.



< 창룡문 >

 화성의 동쪽대문으로 동문이라 불린다. 좌창룡 우백호라는 말이 있다. 창룡은 청룡이며 동쪽하늘을 맡은 태세신으로 중국 한나라 낙양성 동쪽문 이름으로 사용된 바 있다. 편액은 칙지헌 유언호1730~1796가 썼으나 없어지고 복원 당시 부지사로 있던 이규희가 썼다. 서체는 해서체로 웅경하고 창일함이 없어 아쉽다.



< 팔달문 >

 팔달산 아래 경사가 평평해지는 지점과 남수문 사이 남쪽을 향하여 건립되었다. 보통 남문이라 불리는 팔달문의 호칭은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에서 따왔다. 문 이름은 정조대왕이 정하였고 편액은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명필 송하 조윤형이 쓰도록 했다. 관각체館閣體의 대표작으로 꼽힐만한 명작이다.



< 화양루 >

 서남각루라고 하는데 팔달산 남쪽 능선에 설치한 용도의 남쪽 끝에 세워져 있다. ‘화’자는 화성을 양은산의 남쪽을 뜻하는 글자로 화성의 남쪽에 세운 문루라는 뜻이다. 편액은 정조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행서체로서 자간은 잘 되었으나 관각체의 웅건함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 화성장대 >

 팔달산 정상에 있다. 편액은 정조의 글씨이며 영조의 필법을 이어 독자적 서풍을 이룩한 웅혼한 행서체이다. 채제공의 상량문에는 “화성의 지세는 진실로 우리나라의 관문이자 요새다. 마침내 연기와 아지랑이 높이 일어나는 곳에 깃발 나부끼고 북소리 울리는 장대를 쌓았다”고 하였다.



< 화서문 >

 화성의 서쪽대문으로 상량문에 보면 “새로운 고을을 만들고 터를 다지니 그 치세가 동도의 낙양과 맞먹은 듯하고 미인을 바라본다는 뜻을 따 서화라는 칭호를 절충했다”고 했으니 서화는 곧 낙양성의 서쪽 대문으로서 ‘서’자와 ‘화’자의 순서를 바꾸어 화서문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편액은 화성 성역의 총책임자였던 좌의정 번암 채제공이 썼다고 전해진다. 그의 서체는 준미俊美함이 있어 인품과 비유될 만하기에 충분하다.



< 여민각 >

 수원 종로 네거리에 있는 종각이다. 1795년 화성행차에서 정조대왕의 “사람들이 모두 화합하여 즐거워하고 모든 가정마다 부유함이 충만하라”는 윤음과 맹자의 민유방본 사상인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연유해 지어진 이름이다. 편액은 근당 양택동이 썼으며 여민동락을 느끼게 하는 부드러운 행초서체이다.



< 화령전 >

 화성행궁 서북쪽에 위치한 건물로 정조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순조가 정조대왕을 추모하기 위하여 화성행궁 옆에 세운 영전影殿이다. 화성행궁이 국왕의 거처라면 화령전은 일반 양반 가옥 뒤편의 사랑처럼 행궁 뒤편에 정조대왕의 초상을 모신 사당이다. 화령전은 화성에서 ‘화’자를 따고 시경 귀령부모에서 ‘령’자를 따 붙였다.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선왕 정조대왕을 찾아가 문안을 드리는 묘전각이다. 편액은 순조가 직접 써서 달았으나 없어지고 지금은 조수호의 행서글씨가 걸려 있는데 화자華字가 약한 게 흠이다.



< 운한각 >

 화령전의 정전正殿으로 정조대왕의 초상을 봉안한 건물이다. 운한이라는 말은 은하수를 말하는데 시경의 대아편에서 따온 것으로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는 시詩로서 비오기를 빌면서 하늘에 기우제를 지낼 때 불려 진 말 가운데 나온 것이다. 정조대왕의 사랑에 이 편액을 순조가 직접 써서 붙인 것은 하늘로 올라간 정조대왕의 혼백이 나라의 어려움을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순조가 썼던 원래의 편액은 사라져 버리고 1975년 화성 복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제작되어 걸려 있었으나 현재는 정도준의 글씨로 그의 스승인 일중 김충현의 해서체가 물씬 풍기는 것을 알 수 있다.



< 풍화당 >

 화령전의 재실로 사용하던 건물로 운학각의 우측 담장 바깥에 있다. 풍화는 풍교의 의미로서 사회의 풍기를 교화한다는 뜻이다. 화령전에 제사가 있을 때에는 헌관獻官이 머무는 장소다. 1845년 8월에 쓴 풍화당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는 정도준의 행기 있는 해서 글씨가 걸려 있다.



< 신풍루 >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그 위치가 외삼문에 해당된다. 처음엔 진남루라 했다. 정조대왕의 남다른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장용대장 조심태에게 쓰게 했다. 조심태는 큰 글씨를 잘 써서 행궁의 곳곳에 많은 편액을 썼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 명하고 당대의 명필 송하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했다. 신풍이란 이름은 중국 한나라 고조에 관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대왕이 화성을 또 하나의 새로운 고향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걸려있는 편액은 원판을 복사하여 새로이 제작한 것으로 원본과 같다하나 고풍을 느낄 수 없어 다소 아쉽다.



< 좌익문 >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살문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당시 정동준이 정조대왕의 명을 받아썼다. 그 후 현판은 사라져 버리고 현재 걸려 있는 것은 정도준이 해서를 행기 있게 썼다.



< 중양문 >

 궁궐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은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이다. 중양문의 명칭은 봄의 별칭인 양중을 뜻하는 것으로 정조대왕의 행차는 대부분 정월에 행하여 졌으므로 봄에 행차하여 행궁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원래 편액은 중약문이었다. 정문으로 옮기면서 중양문으로 고쳤다. 1790년 완성되었는데 당시의 편액은 사라지고 현재는 조수호가 쓴 소전체小篆體가 나약해 보인 듯 걸려 있다.



< 봉수당 >

 화성행궁의 정전건물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건물로 장남헌이라고도 한다. 정조대왕은 이 건물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게 했고 이때 정조대왕은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는 악장과 자신의 마음을 읊은 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송하 조윤형에게 현판을 쓰게 했다. 이 건물은 원래 완성될 당시는 장남헌이라고 이름하여 편액은 정조대왕이 직접 써서 붙였다는 데 이름이 바뀌면서 장남헌의 편액은 문화재청에 보관 되어 있고 봉수당의 편액은 없어져 버렸다. 1997년 봉수당 건물이 복원되자 기록에 남아있던 원판을 복사해서 다시 제작하여 걸었는데 관각체의 특징이 잘 살아 있다.



< 유여택 >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쳐하다가 정조대왕이 행차 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이란 이름은 시경 황의편에서 따왔는데 “상제께서 모두 물리치시고 나라의 규모를 크게 하리라. 이내 서녘을 돌아보시고 이 집을 주었다.”라는 내용이다. 정조대왕의 입장에서는 서녘 화성유수를 임명하여 내려 보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편액은 당시 정조대왕의 방어사였던 유사모가 썼는데 없어지고 현재는 정도준의 해서글씨가 걸려 있다.



< 장락당 >

 침전으로 봉수당 남쪽에 있는 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중국 전한의 도읍인 장안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대왕은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와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정조대왕이 쓴 현판은 문화재청에 보관되었고 현재 걸려 있는 편액은 정조대왕의 글씨를 복사하여 새로이 만든 것이다.



< 낙남헌 >

 행사용 건물로 현재 신풍초등학교 운동장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이름은 중국후한시대 낙양성 남궁에서 따왔다.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고 혜경궁 홍씨 회갑을 기념한 기로연을 시행했었고 낙남헌에서의 양로잔치는 혜경궁의 회갑연인 만큼 당년 61세인 수원부 백성은 모두 참석토록 하였는데 참석한 400여명에게 비단 한필씩을 주었다. 편액은 당대의 명필 송하 조윤형의 행서체인데 다른 편액도 마찬가지로 후대에 복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 미로한정 >

 행궁후원에 만든 정자이다. 후원 서쪽 담 안에 있는데 미로한정이란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1804년에 세자에게 양위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대왕의 뜻이 담겨진 이름이다. 화성행궁은 창덕궁과 같이 후원後園을 정원으로 가꾸었는데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에서의 휴식을 위한 부대시설로 지어졌다. 당시 편액은 사라지고 현재는 조수호의 행서 글씨가 걸려 있다.



< 득중정 >

 활터에 세운 정자로 노래당 남쪽과 이어져 서쪽으로 꺾여 진 지점에 세웠다. 득중정은 예기에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諸侯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선비들이 활쏘기를 할 목적으로 덕행을 관찰하는 것으로 정곡을 맞춘 사람은 이미 마음속에 덕이 있어서 모든 행동이 도리에 맞는 것으로 여겼다. 편액은 정조대왕이 직접 써서 걸게 하였는데 온후溫厚함이 있는 필획이다.



< 경룡관 >

 장락당의 외문으로도 사용한 부속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중국 당태종이 거처한 중궐 이름에서 따왔다. 당 태종은 훌륭한 정치를 펼쳐 당나라를 태평성대하게 만든 제왕의 모범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정조대왕은 당 태종의 궁궐 이름을 따온 이 경룡관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왕조의 태평성대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편액은 천은 조종현이 썼는데 없어지고 현재 걸려있는 것은 각자장 김각한이 쓰고 새겼다.



< 복내당 >

 행궁의 내당으로 정조가 행차 시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정조가 행차 시에 직접 써서 달았던 편액은 사라지고 현재는 정도준이 쓴 글씨가 걸려 있다.



< 노래당 >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각종 행사 중에 휴식을 취하는 건물이다. 노래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거쳐 가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대왕이 지은 시 가운데 “주나라 노래자가 70세가 넘어도 어버이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때때옷을 입고 어버이 곁에서 재롱을 부렸다.”는 고사에서 인용하였다. 이 역시 정조대왕이 장차 화성에 내려와 혜경궁을 극진히 모시겠다는 뜻을 잘 표현하였던 것이다. 편액은 당시 좌의정 채제공이 썼는데 어디론지 사라지고 원본을 복사해 새로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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