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를 정점으로 추진된 화성건설의 배경에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후 벌어진 정조 후계자의 ‘죽음’,‘탄생’의 계기들이 연관돼 있다. 이글에서 ‘화성’이란 성곽뿐만 아니라 도시기반시설과 생산기반시설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먼저 임오년(1762)에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서 굶어 죽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사도세자는 28세의 장성한 나이였고 정조는 11살로 비참한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 해야 했다. 사도세자를 죽일 당시 영조는 69세로 ‘격분’의 상태였다. 더구나 재위 38년으로 왕권은 공고하여 누구도 그의 의사 결정에 이의제기는 불가능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임 이후 영조는 두 가지 처분을 내렸다. 그 하나는 정조에게 “네 스스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것, 즉 사도세자를 왕으로 올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1764년 2월 20일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하여 종통을 이어받도록 한 것이다. 이른바 ‘갑신처분’이다. 정조는 10살에 죽은 사도세자의 배다른 형 효장세자의 아들이 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족보상 아버지가 아니게 된 것이다. 영조의 처분은 정조가 ‘죄인의 아들’이라는 혐의를 면하게 해준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아들이 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 할 수 없었고 어머니 혜빈은 왕대비가 될 수 없었다. 살아있는 어머니는‘혜경궁’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혜경궁 홍씨는 그가 쓴 『한중록』에서 시아버지 영조의‘편집증’에 대한 일화와 함께 ‘갑신처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세손(정조)의 망극한 설움”으로 “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곡을 하여 몸이 많이 상하신지라”, 혜경궁 본인은 “간장이 녹을 듯 가슴이 터질 듯하여 즉시 명을 결단코자 하니라”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재위 10년 만에 하나의 계기가 생겼다. 그것도 참혹한 사건, 1786년 5살 된 문효세자가 천연두를 앓다가 사망하고 같은 해에 사랑하던 의빈 성씨가 임신한 몸으로 사망한 것이다. 우환과 흉사가 닥쳤을 때 봉건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거나, 조상묘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정조의 고모부인 박명원은 1789년 7월11일
“아, 병오년(1786) 5월과 9월의 변고(變故)에 대해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고 생모(生母)인 의빈(宜嬪)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며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을 찾아 새롭게 옮길 것을 건의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으로 옮기게 되는 계기는 바로‘병오년의 변고’였던 것이다.
연이은‘죽음’에 대해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흉지로 생각하였고, 이장을 결심하고 천하명당을 찾을 것을 명하였다. 그리하여 1789년 윤선도의『고산유고』에 지목한 “구 수원부 읍치 호장(戶長) 뒷산 천재일우의 명당”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그곳에 있던 관청, 상가, 민가들을 몽땅 팔달산 동쪽으로 통째로 옮겨가면서 수원이 새로운 ‘신도시’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신도시가 건설되는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1790년에 순조가 태어나면서였다. 1789년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구 읍치 화산(花山)으로 옮긴 다음 해인 1790년 6월 18일 수빈박씨는 순조를 생산하였으며, 이는 39살의 정조에게 후계자가 생긴 특별하고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더 나아가 순조가 성인이 되는 갑자년(1804)에 왕위를 물려주고 그에게 사도세자 추숭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영조가 지시한 “네 스스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는 엄명을 비껴갈 수 있는 묘책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수원에 머물며 순조가 사도세자를 추숭하게 하고, 공고해진 왕권을 활용하여 본인이 구상하고 계획했던 개혁정치를 펼치고자 성곽건설뿐만 아니라 자급자족의 화성신도시를 정력적으로 건설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조참의까지 역임했던 강유는 1790년 6월 수원에 성을 쌓을 것을 상소하여 화성축성을 공론화하였다.
이후 1793년 1월에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바꾸고 부사(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조선조 제2의 도시를 지향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정조는 가장 신망하던 남인의 영수이며 좌의정을 역임한 채제공을 초대 화성유수로 임명하여 화성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채제공은 화성의 모든 정황을 요해하고 5월경에는‘축성방략’을 올렸다. 이것이 다산 정약용이 설계한 ‘화성기본설계’이다.
드디어 정조는 1974년 1월 15일에 화성 축조에 대하여 하명하고 2년 9개월만인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5.7km에 달하는 성곽과 자급자족의 도시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조가 1800년에 죽음으로써 그의‘갑자년(1804) 구상’은 무산되었다. 정조가 그렇게 바랬던 사도세자의 추숭은 1899년 고종 때에나 이루어졌다.
■ 주요경력
현)
수원화성연구소 소장
전)
수원 화성박물관장
■ 주요저서
「화성 건설 연구」
「18세기 상품화페 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
「선각자 이준열의 삶 」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