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재단법인 정조인문예술재단

통합검색

문화사랑방

칼럼 · 에세이

[정수자 칼럼 2024] 숨길 수 없는, 사랑의 심금을 퉁기듯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4-09-26
조회수
211


숨길 수 없는 것은 숨기기 싫은 걸까. 그런데 숨기고 싶다고 숨길 수는 있는가. 너무 많은 것을 나날이 낱낱이 드러내는 세상에서. 특히 자신의 일상을 시시콜콜 전시하는 SNS는 드러냄의 끝판 같다. 멋지게 드러내기 자기 현시도 점점 고도화하는데, 그와는 아주 다르게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게 있다. 기침과 가난과 사랑이 그렇다고 한다. 기침과 가난 말고, (무수한 사연들 다 접고) 사랑만 보면 숨길 수 없는 속성으로 더 황홀할 수도 있겠다.

 

숨길 수 없는 사랑 중에 공동의 사랑이 있다. 우리 지역에서는 수원화성 사랑이 그렇다. 여러 겹의 사랑이 담보된 성이지만, 특히 밤이면 빛을 발하는 자태로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오래된 성곽에 조명이 드는 순간, 살피를 꼭 맞춘 성돌들이 빚어내는 문양이 그윽하기 짝이 없다. 높고 낮은 지세를 겸허히 받든 성곽이 휘어지고 일어서고 돌아치며 빚어내는 곡선미도 조명에 따라 더 눈부신 그림이 된다. 이런 야경을 찾는 사람들의 감탄사도 사랑의 추임새로 주변을 아름답게 살린다. 숨길 수 없어 더 아름답고, 널리 드러내서 더 도드라지는 사랑의 현현이자 만끽의 풍취다.

 

달 좋은 밤이면 성곽은 달뜬 사랑의 걸음으로 또 빛난다. 올 추석은 추석(秋夕)’ 아닌 하석(夏夕)’ 운운 폭염 속에 비까지 겹쳐 화성 방문이 적을 듯했다. 그런데 성안은 들뜬 웃음소리로 더없이 훤해졌다. 화성 사랑 걸음은 이제 연휴의 필수 즐거움으로 자리 잡았나 보다. 청춘들이 데이트 약속을 성안 어디로 잡는다거나 관광객들이 드라마 속 주인공의 재현을 즐기는 모습이 익숙한 풍경이 됐듯 말이다. 그런 걸음들이 거듭되면 화성의 겉모습은 물론 그 속에 담긴 조선의 건축 정신이며 미학까지도 느끼게 될 것이다. 알면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하듯, 사랑을 통해 더 깊이 즐기고 발견하는 아름다움의 맛이겠다.

 

밤의 성곽을 거닐면 숨길 수 없는 사랑이 더 보인다. 그 중 달이 아주 좋은 가을밤이면 생각나는 정조의 시가 있다. 정조가 자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지은 까닭도 돌아 뵈는 달밤의 정취와 사랑이 격조 있게 직조된 명편이다.

화려한 망루와 성벽이 의기를 과시하네

여기에 항상 오색구름 펼쳐진 걸 보노라

높은 누각은 우뚝 솟아 가을빛과 겨루고

오만 물상은 다 밝아서 달빛에 떠오르네

경치는 유독 오늘밤을 따라 좋거니와

산천은 원래 사시의 아름다움이 있다오

뜨락의 소나무는 더디 크는 게 무방하여라

상국의 집에 맑은 달바퀴 길이 매어 놓으리

 

(?櫓粉城意氣誇 此中常見五雲遮, 高樓直聳爭秋色 萬象俱明泛月華

景物偏從今夜好 山川元有四時佳, 庭松不妨遲遲長 長繫淸輪相國家) -홍재전서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화성에서 지은 시운(詩韻)에 화답하다 4(四首)’의 하나로 동장대에서 중추(中秋)의 달을 구경하다의 시운이다. 17978월 행행에서 지었다니 음력 8월의 달이 좋은 밤을 흐뭇이 거닐었을 정조가 뵈는 듯하다. “상국의 집에 맑은 달바퀴 길이 매어 놓으리라는 대목에서 노쇠한 신하를 생각하는 임금의 사랑이 훤히 드러난다. 이런 사랑과 두터운 신임에 따라 채제공도 축성에 최선을 다했고, 그런 사랑 덕에 더 아름다운 화성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리라.

 

달 좋은 밤, 화성에 서린 사랑의 심금을 흠향한다. 숨길 수 없는 게 사랑이라지만, 사랑의 정도에 따라 발현은 당연히 다르다. 어떤 사랑은 성을 쌓고, 어떤 사랑은 시를 쓰고, 또 어떤 사랑은 사람과 세상을 기른다. 그런 사랑이 있어 우리도 지금 여기서 만나고 즐기고 토닥대며 살아가는 게다. 그대의 집에 맑은 달바퀴 길게 매어놓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가 없듯이.

 


글쓴이


주요약력

(재)정조인문예술재단 이사. 1984년 세종숭모제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등단. 시조시인.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시집
『파도의 일과』, 『그을린 입술』, 『비의 후문』, 『탐하다』, 『허공 우물』, 『저녁의 뒷모습』, 『저물녘 길을 떠나다』,『인칭이점점 두려워질 무렵』 등.

연구서
『한국 현대시의 고전적 미의식 연구』 외에 공저 『한국 현대 시인론』, 『올해의 좋은 시조』 등.

수상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