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이란 말에는 실상 詩가 없다. 깃들어 있는 거랄까. 시 같다는 비유로 치면, 어딘가 시를 연상시킨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더 들여다보면, 시의 기분, 시의 분위기, 시의 기운, 시의 운치 등등 시에 관한 느낌이 다 들어간 표현으로 지평이 넓어진다. 시를 품은, 시가 녹아든, 시를 깨우는, 시를 뿜어내는… 시는 아니지만 시적 아우라를 풍기는 시 같은 문장이랄까.
시적이라고, 흔히 써온 표현이 새롭게 운위된 것은 최근의 지면을 장식한 때문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선정 당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압축된 평에서 ‘시적 산문’이 세간의 주의를 새삼 끌었던 것이다. 그 표현이 어떤 강렬한 시적 영감 같은 전율을 불러냈다고 할까. 물론 역사 속 폭력을 직시하고 그 안팎을 파헤쳐 자신만의 목소리로 재구성하는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높이 평가하는 문장의 일부다. 그런데 그 안팎의 진실을 찾고 밝히고 전하는 문장들이 시적이어서 소설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더 높였다는 말로 읽힌다.
그 후 ‘시적 산문’에 대한 조명과 분석이 다양하게 나왔다. 시적 전통이 강한 한국의 문학적 특성이나 시인으로 출발한 한강 작가의 이력 톺아보기부터, 세계문학 판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가 강한 한국 상황과 연결한 읽기와 해석 등등 노벨상 소식 이상의 들뜸이 풍요롭게 꽃피웠다. 시가 예술의 정수로 인식되긴 했지만, 현재 세계문학시장에서 소설보다 왜소해진 시의 판만 비교해도 한국의 시적 위상이 부각되는 면도 새로웠다. 다양한 분석과 평가와 주관적 읽기의 개진 중에도 작가의 문체가 시적 산문으로 국제적 찬사를 받는 데 따른 반응들이 크게 닿았다.
사실 한강 소설을 보면 문장 하나를 허투루 놓지 않는 문장의 정밀한 선택과 배열이 도드라진다. 쉼표, 마침표, 말줄임표 같은 문장부호는 물론 의미나 이미지에 따른 시적 구성으로 이루는 문장의 맛이 독보적인 것이다. 장식적 수사 없이 간결한 문장들은 마치 각을 하듯 작가의 깊은 숨을 품고 있어 가히 일품이라는 탄복의 밑줄도 긋게 한다. 참혹한 장면에서도 자칫 빠질 법한 감정의 과잉 하나 없이 시종 절제된 문장들로 울림을 이루며 시적 여백을 넓힌다. 그렇듯 간명하고 정제된 문장들이 번역을 통해서도 충분히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전해진다니 한국어의 놀라운 확장이다. 시적인 것에 부여하는 최상의 의미에서도.
그런데 시적이라는 표현은 우리네 일상에서 흔하게 쓰인 말이다. 어떤 사람의 언행에 ‘좀 시적이야’라는 언사를 보냈다면, 찬사라기보다 현실과 괴리된 세계 인식에 대한 야유로 비칠 수 있다. 시적이라는 말의 함의가 넓어서 한때는 젠체하는 유의 피상적 포즈(겉멋)에 대한 포장으로 비치기도 했던 까닭이다. 어딘가 폼 잡는 쪽으로 장신구처럼 시적인 것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면 문학적 진정성에는 어림없는 사이비 느낌을 유발해서다. 이런 것도 한참 전에 지나간 허세 같은 포즈로 시적인 것의 오남용이라 하겠다. 그런 포즈가 무엇보다 비시(非詩)적인 것의 시적 심화 확대와는 차원이 다른 겉멋 수준에 머문다면, 얼른 거둬야 할 낡은 장식에 불과하니 말이다.
강렬한 시적 산문! 이보다 좋은 찬사가 있을까. 한강의 문체에 오래 남을 각별한 인정이다. 예부터 시적이라는 말은, 좋은 산문(수필)이나 인접예술의 완성도에 얹어온 상찬. 하고 보니 시를 사랑한 정조의 문장에도 성찰의 깊이나 운치 등이 시적 아우라로 서려 있었지 싶다. 그 결에 돌아보면, 간명하되 함의 넓은 시적 문장을 깊이 아꼈나니, 뼈를 깎는 마음이라야 한다고. 어찌 죽비 없이 눈물 없이 시적 거듭남을 꿈꾸리오.
한해 끝에서 새해의 길을 당기듯, 새겨둔 말을 다시 본다. 시인에게 정말로 중요한 시간은 “혼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거추장스런 망토와 가면과 허례허식을 모두 벗어던진 채 고요한 침묵에 잠겨, 아직 채 메워지지 않은 종이를 앞에 놓고 조용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그런 순간”이라고.(비스와바 심보르스카, 1996년 노벨상 시상식에서)
글쓴이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