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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가을답사 후기] 성향숙 : 위로받다, 순천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0-11-20
조회수
957

위로받다, 순천



문득 여행

봄도 그렇고 초록이 덕지덕지 묻은 계절도 그랬고 시간이 조용히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코로나19의 가을을 또 그렇게 보내는 중이었다.

나무들 속의 숨은 색상들이 초록과 뒤엉켜 아우성인데 이 가을도 공원의 개들만을 위한 계절인가? 11월엔 공원의 벤치도 어디론가 떠날까 싶어 은발의 할머니들이 봄의 연인들을 위해 벤치를 지키고 앉아있는 거라는데, 우린 또 자발적 수인의 처지로 들썩이는 엉덩이 자숙하자고 다독일 즈음. 문득 숨구멍을 뚫어 줄 가을여행 제안은 너무 설레었다.

 

이른 아침, 때 이른 추위로 좀 쌀쌀했지만 볼에 닿는 공기의 감촉은 감미로웠다. 햇살은 맑았고 하늘을 높고 파랬다. 누군가 예비한 공원의 벤치처럼 키 큰 관광버스 좌석 두 자리씩 차지하고 네 시간 달려 도착한 순천의 첫 숟가락은 맛있었다.



 - 낮은 지붕들을 감싼 협축이 도로처럼 자리하고 있다



낙안팔경에 붙여

버스 안에서 낙안읍성의 성벽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 이달호 선생님의 말씀은 이어폰속의 라라 파비앙(바람 속에서도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요, 감상적인 가을여행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 가사인가?)과 뒤섞여 들릴 듯 말 듯 바람처럼 스쳤으나 협축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들어왔다. , 이래서 협축이라고 하는구나. 차도 다닐 만큼 축과 축 사이가 넓은 그 위로 올라 걷기로 한다. 높은 성벽에서 내려다 본 낙안읍성의 낮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였다가 흩어졌다. 한 무더기 도시인들의 방문을 맞이하는 아주 오래 된 웅성거림이 들렸다. 곳곳의 늙은 나무들은 유럽 어느 카페의 연미복 입은 노신사 같은 멋스러움이 풍겼다. 나무들은 쓰러져 숨이 다할 때까지도 멋이 있더라구요. 여기저기 휴대폰 카메라 셔터소리는 경쾌했다.

서문에서 출발해 빠져나온 동문엔 낙안팔경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금강모종(금전산 금강암에서 들려오는 저녁종소리) 백이청풍(백이산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 오봉명월(오봉상 위에 떠오르는 밝고 둥근달) 보람조하(제석산 허리에 피어오르는 아침안개) 옥산종죽(옥산에서 나는 곧은 신우대) 원포귀범(선수앞 바다의 돛단배) 용추수석(용소의 맑은 물과 깨끗한 돌멩이) 안동화류(안동(내동)내의 꽃과 버들)이다.

낙안의 팔경은 고정된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성과 소멸을 담은 무형, 장소와 장소 사이를 이동하는 아토포스적 풍경이라니 신선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대로 순하게 살아가는 순천 사람들의 멋인가 싶었다.



 - 순한 사람들의 순한 이치를 깨달음



갈대와 낙조

가까이 가야 갈대다. 무리지어 발걸음을 옮기는 우리들은 군데군데 핀 억새와 갈대를 보고 둘의 차이를 말하며 웃고 떠든다. 저 작은 다리를 건너면 넒은 공간의 갈대밭이 있단다. 할머니들의 은발이나 하얀 눈밭을 상상한 갈대밭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지만 엷은 갈색이 펼쳐진 공간은 광활했다. 갈대밭 위에 몸을 던져 허물어지면 다 받아줄 것 같은 아늑함이 전해왔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자 갈대는 소곤소곤 속삭였다. 바람이 부는 곳에선 격렬하게 손짓하는 갈대가 마치 윤슬처럼 맑은 햇살을 자유자재로 튕겨내고 있다. 흔들리는 갈대의 저런 모습을 여인의 마음에 빗대었던가? 여자의 마음까지도 흔드는 갈대밭에서 두 시간 이상 서성대다가 돌아온 지 며칠 되었지만 날개 비비적거리는 소리가 좀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한곳에 붙박여 떠날 수 없는 자의 떠나고 싶은 몸부림이 저 갈대 같을까?


  - 갈대가 튕겨내는 햇살


되짚어 올라와야 할 당일치기 여행이라 빨간 햇덩이가 바다로 툭 떨어지는 광경을 감상하기는 좀 어렵겠다고 한다. 열기를 잃는 해가 서서히 식으며 어둠을 토해내는 과정을 보지 못했지만 앙상한 나무들을 옆에 끼고 붉은 빛깔을 유유히 털어내는 태양을 보았다. , 멋져. 잠깐 동안이지만 앙상한 나무가 한껏 돋보이는 풍경이 되도록 지는 태양은 기꺼이 저녁의 악세사리가 된다. 



 - 기꺼이 앙상한 나무의 곁에 선 저녁노을


여행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긴다. 몇 년 전 순천만국가정원을 다녀오면서도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못해 아쉬웠었는데 이번 여행도 또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왔다. 다음에 또 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놔야 다른 설렘으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순천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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