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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가을답사 후기] 박설희:역사와 자연생태의 보고, 순천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0-11-20
조회수
666

역사와 자연생태의 보고, 순천

 

박설희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답사를 떠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더구나 목적지가 순천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오랜 팬데믹에 심신이 지쳐있던 차에 정조인문예술재단에서 순천 답사를 마련했다기에 얼른 신청을 했다.

순천하면 떠오르는 것이 선암사, 송광사, 낙안읍성, 순천만 습지, 순천만 국가공원, 순천문학관, 고인돌공원, 여순 사건 등인데 역사와 자연생태와 문화의 향기를 두루 흠뻑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낙안읍성에서>

 

1110일 화요일. 오전 750분에 출발해 창밖으로 펼쳐지는 가을 들녘을 눈에 담으면서 순천까지 4시간이 넘는 여정 동안 지루한 줄을 몰랐다. 버스 안에서 이달호 선생님이 도성과 읍성, 토성과 석성, 평지성과 산성, 낙안읍성에 대해서 간추린 설명을 해주신다. 낙안읍성은 평야에 쌓은 평지성으로 조선시대 대표적 지방계획도시다. 원래 토성이었다가 수차례 개축, 중수되면서 석성이 되었는데 조선시대 읍성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고 성안 마을은 전통적 면모를 간직하고 있어 우리 민속을 살피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낙안읍성 입구에서 꼬막 정식을 맛나게 먹고 성곽을 따라 주욱 걸어본다. 서문쪽에서 출발해서 돌계단을 밟고 성곽 위로 올라서면 잠시 후 빈기등에 이르고 이곳에서 바라본 낙안읍성의 전모가 압권이다. 가슴이 활짝 열릴만큼 호쾌하고 아름답다. 북으로 금전산이 보이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나지막한 초가지붕들이 가득하다

집집마다 감모과유자 열매를 매단 나무들과 장독대들이 정겹다남문에서 성곽을 내려와 골목길에 들어서니 야트막한 돌담 사이에 한복 입고 고무신 신고 지나가는 사람, 키질과 절구질을 하며 벼이삭을 훑는 사람, 새 볏짚으로 초가지붕을 교체하는 사람……. 성내에 주민이 직접 거주하는 민속마을이다 보니 몇 백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간 느낌이다. 오른쪽에 옥사가 있어 들어가봤는데 동헌에서 꽤 떨어져 있고 규모도 제법 되어서 놀랐다. 전에 내가 가본 대부분의 옥사는 동헌 가까이에 붙어 있었다.

마을에는 때가 때인지라 볏짚 지붕을 새로 얹고 있었다. 일을 하는 당사자는 무척 힘들겠지만 쪽빛 하늘 아래 지붕 위에서 작업하는 사람은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다워 나는 연신 셔터를 눌러대느라 바빴다.

임경업 장군 비각은 임진왜란 때 훼손된 낙안읍성을 보수하고 청나라와의 전쟁 때 큰 공을 세운 것,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기 위해 군민들이 세웠다고 한다. 동헌과 객사 등은 전에 와서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동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을은 눈이 자꾸 나무와 하늘로 향하기 마련인 계절. 몇 백 살인지 알 수 없는 은행나무에 한없이 시선이 머무르다 다시 시선이 모과나무에 붙들리고…….

낙안읍성은 소리의 고장으로 가야금병창, 판소리 등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명창 송만갑과 오태석의 생가가 읍성 안에 있다는데 시간상 그냥 지나쳤다.

  파란 하늘 아래 푸르게 흔들리는 깃발들과 동문이 보인다. 동문 누각 이름이 낙풍루(樂?樓)여서 수원 화성의 신풍루(新?樓)를 떠올리게 했다. 낙풍루는 낙안읍성 정문처럼 사용되는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옹성을 쌓고 4개의 치성을 설치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읍성과 마찬가지로 동서남에 3개의 성문을 두었으나 현재는 남문과 동문만 있다. 동문 바깥에는 개천이 흐르는데 해자라고 하기엔 얕아서 자연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천만 습지>

 

낙안읍성에서 순천만 습지를 향하는 도중에 옛 추억이 떠오른다. 순천에 돌아볼 곳이 많다 보니 낙조를 보겠다고 순천만 습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진 다음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발길을 돌리기도 아쉬워서 갈대들 사이를 걷기 시작했는데 가로등 하나 없는, 말 그대로 암흑뿐이었다. 눈을 뜨나 감으나 마찬가지였는데 생태보존을 위해 인공조명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갈대밭을 거닐었으나 갈대는 보지 못하고 벌레소리와 바람소리로 충만한 어둠을 가슴 깊이 흡입한 채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갈대밭에서 갈대를 보지 못했다 하면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그러나 무얼 보았느냐가 중요하겠는가. 어둠 속에서 갈대로 흔들려보았는데.

오후 세시가 채 안된 무렵이라 해는 아직 중천에 있는데 갈대밭 위로 오후의 햇살이 부서지고 금빛, 은빛, 갈빛으로 일렁이는 갈대 사이에서 우리들의 그림자도 함께 일렁였다. 갈대밭 사이로 숱한 사람들이 풍경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읽은 손택수 시집에 차경(借景), 창을 내고 문을 내서 풍경을 들이는 일이 빚이라고,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고라는 구절이 있었다. 풍경을 빌린 나도 풍경으로 내어주어야 하고, 나도 빌려갈 만한 풍경이 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일 것이다. 갈대밭 사이에서 풍경을 빌리고 나도 누군가의 풍경으로 내어주는 일.

낙조를 보기 위해 용산전망대를 향해 걷다가 출렁다리 부근에서 일행과 헤어지고 쉬엄쉬엄 산길을 걷는다.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반려 삼아 내 숨소리에 집중하면서.

용산 전망대에 드디어 도착했다. 탄성이 먼저 새어나왔다. 맑은 하늘과 갯벌과 갯골, 그리고 붉게 물든 염생칠면초와 황금빛 원형갈대밭. 강의 끝과 바다의 시작점의 경계가 없었다. 물길 따라 물이 들며나며 휘어지는 갯골의 아름다운 모습. 온통 반짝이기로 작정한 물살 위에 유유히 떠가는 배 한 척. 잠시 후 정수자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바로 그 배 위에 떠 있노라고. 순천만 생태체험선이리라.

다음엔 꼭 저 배를 타고 물길 따라 가봐야겠다.

낙조는 기다림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몰이 가장 멋진 곳이라는데 그걸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러라고 시간도 넉넉히 530분까지 주었지만 오늘 일몰은 517. 낙조를 보고 출발하면 약속한 시각까지 주차장에 도착할 수가 없다. 아쉬운 대로 전망대 주변에 활짝 피어 있는 동백을 눈에 담고 용산전망대를 떠났다.

갈대습지까지 내려왔을 땐 벌써 온누리에 붉은 물감을 부어놓은 듯하다. 해가 지는 걸 알았는지 새떼들이 이동하며 하늘을 수놓고 있다. 흑두루미 등 국제적 희귀조류의 월동지라는데 저 중에 있을까. 붉은 일렁임으로 하늘과 땅이 온통 그득하다.

 

여행은 돌아옴으로 완성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순천만 새벽안개를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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