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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상반기 역사탐방 후기] 조경미 : 반계(磻溪) 유형원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다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4-07-10
조회수
229

반계(磻溪) 유형원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다

 -정조인문예술재단 2024 역사탐방 전라북도 부안


조경미


이제 막 뜨거운 여름의 문턱에 다다른 6월 중순에 부안에 있는 반계 유형원 선생의 서당을 방문하였다. 화창한 날씨였지만 부안지역 지진으로 인한 재난안내문자로 마음 한편에 불안을 안고 떠난 여정이었다.

가는 길에 정조인문예술재단 김영호 이사님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설명을 들으면서 국사 시간에 배운 것은 정말 수박 겉핥기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가 오늘 만나야 할 반계(磻溪) 유형원은 누구인가. 유형원은 조선후기 반계수록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다. 유형원의 스승과 지인들은 유형원이 재능이 있음에도 관직에 오르지 않음을 안타까워해서 효종 때부터 현종 때까지 꾸준히 천거되었으나 그는 계속 사양했다고 한다. 자신을 키워준 조부의 사망 후 32세부터 할아버지의 농장을 경작하기 위해 전라북도 부안에 은거하다가 사망했는데, 이때 체험한 농촌생활을 토대로 경세제민의 정책론인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이 책은 100년 뒤 영조에 의해 출판되었고 후에 정조대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문은 실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는 단초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정치·경제·역사·지리·군사·언어·문학 등의 저서는 목록만 전해진다.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반계서당에 오르는 길.

길 입구에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입석이 있어 여기에 실학의 선구자 유형원 선생의 서당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청미래 둥근 열매가 빼꼼히 고개 내민 가파른 길을 30여 분에 걸쳐 올랐다. 등이 흠뻑 젖을 때쯤 눈앞에 서당이 나타났다. 서당 앞 작은 정자에서 가빠진 숨을 고르고 불어오는 골바람에 땀을 식히며 설명을 들었다. 지금은 발아래 논밭이 펼쳐져 있지만, 예전엔 배가 드나들던 바다였다고 하니 반계서당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상상이 됐다. 그의 제자들은 오로지 공부를 위해 낫과 호미를 잠시 내려놓고 오늘의 우리처럼 비탈길을 오르며 학문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로 잔뜩 상기되었으리라.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작은 서당은 안팎으로 작은 연못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뒤뜰엔 엉겅퀴와 개망초가 흐드러져 그 모습이 자못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왔던 길을 빠르게 되돌아와 곰소쉼터로 향했다. 부안에서 유명한 뽕잎정식으로 맛있게 식사하고 바로 옆 내소사로 향했다. 능가산 내소사는 일주문에서부터 쭉 이어진 전나무 숲길이 유명한데 길이가 400~600m에 달한다. 어쩐 일인지 검색할 때마다 늘어나는 전나무 숲길이다. 전나무는 뿌리가 깊게 뻗지 않아서 잘 쓰러진단다. 그래서 그런지 군데군데 태풍으로 인해 쓰러진 나무들이 많이 보였다.

절 안팎으로 1000년 된 할머니 느티나무와 600년 된 할아버지 느티나무가 있는데 불교가 종교로 자리 잡기 위해 토속신앙을 흡수한 상징이라고 한다. 국내 사찰에 가면 낯선 건축물인 산신각, 칠성각이 있는데 같은 이유이다. 내소사의 느티나무가 특별한 것은 나무를 기반으로 한 토템신앙이 불교와 어우러져 현재까지 이어져 매년 정월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는 것이다. 두 느티나무는 단단한 둥치에 알록달록한 오색천을 매단 두꺼운 금줄을 두르고 내소사의 수호신으로서 우뚝 서 있었다.

 

천왕문을 지나면 가람 중앙에 빛바랜 단청과 화려한 공포로 과거의 영화를 보여주는 대웅보전이 있다. 대웅보전의 꽃살문과 보단 뒷벽의 백의 관세음보살 탱화, 그리고 물고기를 입에 문 용에 걸쳐진 대들보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빛바랜 채로 그대로인 단청이 소박한 대웅보전을 더욱 경건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나무에 관심이 많다면 앞마당에 있는 300살 된 보리수나무를 눈여겨보자.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피나무를 보리수나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피나무 열매로 염주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보기 힘든 꿀벌들이 노랗게 만발한 피나무꽃에 앉아 맛있는 꿀을 따고 있었다. 내소사의 뜻이 이곳에 오면 소생한다라고 하니 휴식이 필요한 분들이 방문하면 좋을 것 같다.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변산반도에 있는 채석강으로 향했다. 채석강은 중국의 명소인 채석강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강이 아니라 바다다. 채석강은 변성암, 화강암, 화산암, 주상절리 등 모든 종류의 암석을 관찰할 수 있어 세계지질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안지진의 여파로 여진이 계속되고 있어 입장이 금지되었다. 아쉬운 마음을 모래사장을 걷는 것으로 달래고 뒤돌아섰다.

 

아마도 유형원은 오늘 우리가 걸었던 곳을 수없이 왔다 갔을 것이다. 초야에 묻혀 살았지만 조선 전국 백성들의 사정을 잘 알았다고 하니 그가 다닌 발자취가 전국에 남아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 기원을 둔 사회주의 사상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 균전제를 주장한 것은 그의 학문이 탁상공론이 아닌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특히 영·정조대에 그의 저서가 높이 평가받았는데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유형원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때가 정조대이다.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뛰어난 실학자이다. 정조는 유형원의 이론을 정약용과 함께 수원에 실현하려 했다고 한다. 또한 정약용은 의학에도 뜻이 있어 죽음을 무릅쓰고 서양의 우두법을 책으로 남겨놓았다고 하니 조선 실학자들의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다.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여행을 마친 지금은 유형원, 정약용, 박제가의 이름을 듣게 되면 백성들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인문학이란 과거와 현재,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사랑의 다리를 놓는 학문이 아닐까? 사람의 생각과 문화가 물결처럼 퍼져 닿게 되는 접점이 결국은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의 우리는 후손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과거의 사람들 덕분에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리라. 다시 한번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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