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 언덕배기에 숱한 연들이 날고 있다. 절로 고저장단의 율격을 만들며 승천의 꿈에 젖어 있다. 저마다 실타래를 풀었다 조였다 분주하다. 그 곁엔 연이야 어찌됐건 신나는 꼬마들. 남녀노소 평화로운 모습들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화폭이다. 내게도 저런 날이 있었나? 언제였더라, 기억이 아슴아슴하다. 이 땅에 저런 행복이 얼마나 있었나? 지금이 감사할수록 아픈 기억들이 밀려온다. 어떤 풍경 속에 11살 아이가 엎드려 있다. 머리를 땅에 찧어 피범벅된 아버지 뒤에서, 관(冠)과 포(袍)를 벗었다. 할아버지가 안아다가 내보내고 다신 들여보내지 말라 했다. 그러나 사태가 심각해지자 다시 뛰어 들어가 “할아버지,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제발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하며 울부짖는다. 지금으로부터 262년 전 이즈음[양력 7월]의 일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잡고 대궐 어귀 어디선가 연 날리고 싶었을 그 소년이, 못 다 이룬 소원을 후손들을 통해 여기서 실컷 이루게 한다 싶었다. 아름다움의 속말은 슬픔이었다.
나는 체질적으로 궁궐을 싫어한다. 서울 도성의 성곽은 더 그렇다. 잘 복원해 놓은 모습을 볼 때마다 다시 뭉개버리고 싶다. 성(城)은 요새다. 요새는 방어시설이다. 옛 역사는 성(城) 따먹기였다. 성주들은, 왕들은 그 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우리도 고려까지는 그랬다. 내가 궁궐을 가기 싫은 이유는 거기에 있고, 성곽을 허물고 싶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성문 열어 놓고 도망치기에 바빴던 임금. 분노한 백성들의 아비규환. 저들에게 성곽은 지배와 복종을 가르는 담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망해서 허물어진 성터는 그 자체로 교훈이다. 그런데 그걸 다시 복원해서 무얼 하려는 건지.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수원 화성은 옛날 그대로 한 치도 어김없이 복원돼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고는 그 사실도 잊었다.
이따금씩 창경궁은 간다. 정조라는 이름 때문이다. 정조는 창경궁에서 태어나 창경궁에서 죽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사도세자도 거기서 죽었다. 평생 정조가 벗어나지 못한 트라우마의 진원지. 하늘이 세계 최고의 천재 임금을 내고서는 세계 최고의 나라로 건설하지 못 하게 막았다. 답답할 때면 한 번씩 들러서 그의 세월과 대화한다. 그러고는 다른 날 잡아서 노량진 <용양봉저정(龍?鳳?亭)>에도 들른다. 노들강 배다리를 건너 정조가 잠시 쉬었던 곳이다. (정자 북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하고, 동에서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굼틀굼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다는 의미로 정조가 써서 붙인 이름이다. 거기서 잘 보이지 않는 노들강변과 행렬이 오갔을 그림들을 그려본다. 저 효심의 끝 화성(華城)까지.
축성(築城)적 상상력은 군인적 상상력이다. 우리 편은 안전하게 상대편은 불리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상대는 밖, 우리는 안이라는 지정학적 위상을 선점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공격과 수비를 선택해야 한다. 피아(彼我)구분에 능숙한 이들은 내부에서도 우리와 너희를 극명하게 나눈다. 우리는 한없이 감싸야 하는 대상이고 너희는 가차 없이 벌해야 하는 적이다. 우리는 순결하고 너희는 불결하다. 우리는 선이고 너희는 악이다.
명나라는 곳곳에 벽을 높여 적을 방비했다. 그래서 아직도 중국 천하에 그들의 성터가 즐비하다. 반면 청나라는 성을 허무는 정치를 했다. 중요하지 않은 성은 정복한 후 허물었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흔적은 별로 없다. 이는 국가의 안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서 그렇다. 명나라는 외환(外患)을, 청나라는 내우(內憂)를 국가 존립의 암적인 요소로 보았다. 외환이 두려운 만큼 화이(華夷)를 나누어 차별화 했다. 청나라는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며 다른 나라는 중국의 신하국이라는 사실만 강조하려 했다. 어쨌든 청나라의 강역이 중국 역대 역사상 가장 넓었다. 그것이 오늘의 중국 지도다.
화성은 성 쌓기와 허물기가 동시에 구현된 성이다.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한 성이다. 그 대표 사례 중의 하나가 낙남헌(洛南軒)이다. 백성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장벽을 허물었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려 했다. ‘천고 제왕(帝王)들이 일찍이 하지 못했던 훌륭한 업적’[정조대왕묘지문]을 이루려 했다. 세자가 열다섯이 되면 양위하고 오려던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염원은 4년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박복이었다. 정조가 11살에 아버지를 잃었듯 그의 자식[순조]도 11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들 부자의 11살은 청천벽력이었다. 난신적자(亂臣賊子)들로 나라가 망할 뻔했고, 세도정치로 나라가 망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11살을 주시해야 한다. 천진난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냐오냐가 만사는 아니다. 선을 제대로 긋는지, 지우는지, 쌓을 줄도 알고 허물 줄도 아는지. 긋고 쌓아서 예법을 익히게 해야 하고, 지우고 허물어서 즐거움[樂]을 누리게 해야 한다. 화성이 희망이었고 절망이었던 저 11살을, 축복으로 대물림하게 해야 한다. 30년 만에 찾은 성이 낯설고 황홀하다. 우리의 과거인 정조가, 우리의 미래인 화성이 눈부시다.
글쓴이 <이형우>
『현대시』 등단
시집 : 『창세기부터』, 『착각』, 『창원국민학교』,
연구서 : 『체질시학』, 『체질과 욕망』, 『체질과 언어』, 『체질과 글쓰기』
김동명 학술상 수상.
<인문포럼 노는> 대표, <인문답사 연구소> 소장. 성결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