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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자 칼럼 2024] 여름의 선한 선물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4-06-26
조회수
271



선물은 선한 마음의 표출이다. 상대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마음의 정표. 무엇보다 받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야 하니 말이다. 받는 입장에서 좋아할지 찾다 보면 상대의 취향과 눈높이도 고려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고른 선물이 뇌물로 둔갑할 수도 있으니 신중한 선택은 필수다. 선을 잘 지키는 선물의 슬기로운 선택이 점점 까다로운 것이다. ‘꽃보다 현금이 애용되는 현실도 그런 까닭에서겠다. 그 중 어려운 것은 나의 주머니 사정이겠지만.

 

유독 선물 많았던 감사의 달을 보내고 꺼내는 선물 운운은 일찍 닥친 폭염 때문이다. 유월은 한여름의 직전이라 좀 쉬며 여름 맞을 준비를 하는 달이었다. 그런데 가마솥더위를 능가할 최강 폭염이 유월부터 들이닥친 것이다. 이런 극한 폭염은 한반도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폭발을 일으키듯 지구의 신음과 비명을 연일 터뜨리고 있다. 지구가 온난화에서 라니냐로 변한다더니 더 예측하기 어려운 기후 변화가 생존의 위협으로 치닫나 보다. 폭증하는 대대적 기후 이변에 세계인이 생명의 보전 자체를 염려하는 동안 폭염 살인이 늘고 있다니 말이다.

 

그런 와중에 여름 선물 운운은 너무 한가한 소리인가. 아니 그래서 더더욱 폭염 물리쳐나갈 여름의 선한 선물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여름 선물이라면 예부터 높이 치며 마음으로 아껴온 부채가 있다. 피서용으로 뛰어난 거야 많겠지만, 부채는 여러 면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선물이다. 우선 크기나 무게가 손에 들고 다니기 편할 만큼 부담이 없는 데다 비용이 적게 드는 것부터 좋은 점이다. 물론 부채도 고급비단이나 최고의 그림 글씨가 담긴 쥘부채 같은 것은 가격이 생각보다 훨씬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이 쉽게 사 들고 다니는 부채는 가벼이 건네기 좋고 마음을 전하는 정도에도 오붓하게 어울린다. 게다가 환경에 크게 해롭지 않은 만듦새에 다 쓰고 버릴 때도 가책을 크게 느끼지 않을 정도니 장점만 많이 보유한 소지품이 아닌가.

 

실은 버리기 어려운 부채도 있기는 하다. 정성껏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넣은 선물의 경우는 낡은 부채도 도저히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부채의 역사를 잠시 보면, 특히 문인화 같은 작품 부채를 많이 나눈 것으로 알려진 옛 선비들의 격조 높은 애장품이 스친다. 당대 최고의 화가나 문인이 쓰고 그린 부채들은 부챗살이 상해 못 쓰게 되면 종이만 따로 떼어내 작품으로 간직했다고 한다. 물론 부채 자체가 예술작품으로 전해지는 것도 퍽 많다. 그렇듯 길고 깊은 전통을 지닌 부채는 심급 높은 예술로 대접을 높이 받았던 것이다. 아름다움을 찾고 아낄 줄 아는 마음에 빠질 수 없는 게 시, 오래 남는 시 한 수를 본다.

 

만이천봉을 한 손에 쥐었으니

겸옹의 신필 여기에서 더욱 뛰어나네

개성사람 손에 들어갔다고 탄식하지 말게

지극한 보물이 결국 나라 안에 있으니

 

정선의 금강산전도 부채가 개성으로 팔려가 서울에선 볼 수 없게 됐을 때, 나라 안에 있으니 다행이라고 위로하듯 다른 부채그림에 덧댄 시다(박준원, 이인숙의 선면화의 세계에서 인용). “만이천봉을 한 손에 쥐게 한다니! 겸재 정선이 2점 그렸다는 금강산 부채그림의 매력을 크게 전하는 시 쓴 이의 마음도 금강산처럼 와 닿는다.

 

바람을 일으키는 실용성에 미감을 얹기에도 좋았던 부채. 무엇보다 손에 들고 부치며 더위 식히기에 알맞아 소장자 손의 사랑을 듬뿍 받은 존재다. 지금은 센 바람을 지속하는 휴대용 선풍기가 외출의 필수품으로 애용되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부채의 운치를 건전지 손풍기가 따를 수 있으랴. 부채가 옆 사람에게 전하는 바람의 품까지 은은히 품고 있는 까닭이다. 부채 바람을 옆으로 슬며시 건네며 더불어 웃을 때의 맛이라니! 아무튼 가방에 쏙 넣었다 꺼내서 차르르 펼치는 맛도 좋지만, 부채 바람을 나누는 맛도 선선하니 일품이다.

 

부채는 선하고 훤칠한 여름의 선물. 미약한 힘이지만 더위를 덜면서 자연풍이라는 바람의 가치를 깨워준다. 선한 쓰임새에 예술적 풍치까지 누리게 하니, 부채란 새겨볼수록 아름답지 아니한가. 폭염에는 에어컨을 가까이 할지라도, 이토록 선하고 어여쁜 부채를 더 가까이 애완하고 싶지 아니한가.




글쓴이

주요약력

(재)정조인문예술재단 이사. 1984년 세종숭모제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등단. 시조시인.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시집
『파도의 일과』, 『그을린 입술』, 『비의 후문』, 『탐하다』, 『허공 우물』, 『저녁의 뒷모습』, 『저물녘 길을 떠나다』,『인칭이점점 두려워질 무렵』 등.

연구서
『한국 현대시의 고전적 미의식 연구』 외에 공저 『한국 현대 시인론』, 『올해의 좋은 시조』 등.

수상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