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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에세이

[정수자 칼럼 2024] 책읽기가 힙하다니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4-08-29
조회수
278


요즘 힙하다는 놀이가 뜨고 있다. 이름 하여 텍스트 힙(Text Hip)’. 오래된 텍스트에 새로운 힙하다를 결합해 즐기는 낯선 놀이의 신조어다. 쉽게 보면 책 들고 제멋의 소감과 함께 사진을 찍는 일종의 독서놀이다. 이제 일상의 놀이가 된 인증샷 중에서도 책 들고 찍는 게 새로운 놀이로 유행하다니, 어디로 튈지 모를 MZ세대의 발랄한 발상이다.

 

힙하다는 몇 년 전부터 써온 신조어지만, 우리말로 바꿔 쓰기가 마땅찮아 그냥 쓴다. 풀이는 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하다고 하면서도 규범 표기는 미확정으로 쓰는 까닭이다. 독특하게 자리 잡은 그 말만의 맛 때문에 번역해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힙하다는 것은 그럴 만한 것을 찾아낸 소수가 선도하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특성이 있다. 소수만 즐기는 희소성을 중시하는 만큼 소문이 나고 합류가 늘면 그들만의 힙한 것()을 찾아 새로운 탐험을 떠난다는 것이다. 옛날에 생존의 먹거리 찾아 새로운 미개지를 개척하던 유목의 SNS화랄까.

 

그런 미답의 발견과 개척을 앞세우는 판에서 책읽기가 힙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책도 종이책이어야 하는데, 휴대폰 전자책에 익숙한 젊은 독자층에서는 종이책으로 더 귀한 가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아무려나 주변의 강요가 연상되는 오래된 독서를 새로운 놀이로 만들어 즐기는 데서 MZ세대의 발상이 놀랍다. 텍스트 힙은 독서 중 무심히 찍힌 듯한 장면에 직접 쓴 글씨로 자기만의 감성 메모 덧붙이기 정도의 표현이면 기본을 하는 게다. 책을 어떻게 읽었고 무엇을 얻었는지 등등 반강제로 썼던 학창시절 독후감과는 전혀 다른 버전의 독서놀이로 신선하게 만든 것이다.

 

돌아보면 책을 자기 과시에 활용한 예는 많았다. 읽지도 않는 새 전집을 거실에 장식으로 가득 꽂아놨다고 졸부 흉보던 시절에도 그랬다. 그리고 두꺼운 책 몇 권 껴안고 다니는 모습으로 대학생의 전형적 포즈를 그린 것도 과시의 예라 하겠다. 그런데 종이책 읽는 인증샷이 새삼스럽게 SNS의 힙한 놀이로 뜨다니 과시의 진화 같다. 아니 진화라기보다 그냥 그들만의 독서놀이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냈다는 표현이 맞겠다. 아무튼 손으로 글씨 쓰는 일조차 귀찮아하는 청춘들이 자발적으로 책을 사고 자기만의 독서 감상을 써서 즐기는 텍스트 힙이라는 유행은 반갑다.

 

텍스트 힙도 그간의 SNS놀이들처럼 일시적으로 떴다가 금세 빠질 수 있다. 그럼에도 눈귀가 번쩍 뜨이는 유행이니 응원하고 싶고, 계속 이어가길 기대하는 마음이다. 비록 책을 다 읽지는 않더라도 자기가 책을 골라 사고 읽는 그 행위를 놀이문화로 만든 자체가 귀해 보이니 말이다. 인용하기도 부끄러운 한국인의 독서량을 요즘 2,30대가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고무적이다. 그렇듯 서점에 가서 종이책을 고르고 산다는 것, 그리고 읽고 뭔가 남긴다는 것, 거기서 꺼져가는 독서의 불빛을 느낀다. 그러다 문득 독서라면 왕 중의 왕이었던 정조대왕을 떠올려본다. 일생 책을 놓지 않았던 정조가 요즘의 텍스트 힙을 보면 흐뭇해져서 상이라도 내리고 싶지 않을까.

 

오늘도 힙하게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책방이나 책장을 뒤져볼 일이다. 그리고 어떤 구절이 마음을 더 울렸다면 골라둔 종이에 옮겨볼 일이다. 좀 허술해도 좋은 자신만의 독서 소감을 사진으로 남기면 즐거움이 더 오롯해지리라. 텍스트 힙 따라 하긴 아니라도, 나에게 새겨두고 싶은 한 줄을 발견하면 거듭나게 마련이다. 다시 찾은 한 줄의 명문장을 되뇌듯, 마음 개키며 가만가만 옮겨 적어본다.

 

*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멋진 유희다.

(마리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Maria Wisława Anna Szymborsk)   



글쓴이


주요약력

(재)정조인문예술재단 이사. 1984년 세종숭모제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등단. 시조시인.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시집
『파도의 일과』, 『그을린 입술』, 『비의 후문』, 『탐하다』, 『허공 우물』, 『저녁의 뒷모습』, 『저물녘 길을 떠나다』,『인칭이점점 두려워질 무렵』 등.

연구서
『한국 현대시의 고전적 미의식 연구』 외에 공저 『한국 현대 시인론』, 『올해의 좋은 시조』 등.

수상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