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재단법인 정조인문예술재단

통합검색

문화사랑방

칼럼 · 에세이

[염창권 칼럼 2025]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열었던 영·정조 시대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5-07-24
조회수
142



1. 성시(城市)의 시민

 

1989227, 처음으로 마주친 수원의 이미지는 장안문의 성곽처럼 우람한 것이었다. 장안문을 배경으로 우리 두 사람은 신혼 사진을 찍었다. 전날 결혼식을 올렸으나, 경기도 전출 통보를 받은 나로서는 또 다른 복명을 위해 도교육청을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그때는 카프카의 ()에 나오는 주인공 K의 심정이었다.

잘 축성된 성곽을 어깨에 두른 채, 압도적인 궁궐 이미지로 다가오는 장안문을 바라보았다. 낯선 감각이 밀려왔고, 나는 이곳 성시(城市)의 이방인이었다. 그해 1, 나는 교원대 석사과정 파견 근무에 합격하였다. 관외 전출 희망을 낸 이후의 일이다. 농촌 인구의 수도권 유입으로 인하여, 경기도 전입 교사가 천 명을 넘던 시절이다. 전산망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절이니, 나와 같은 경우가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에 나는 수원시 권선구의 한 빌라에 세를 얻어 5년 동안 수원시민이 되었다. 도시의 시민이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2. 수원 화성에서

 

우리가 수원에 살게 되면서, 친지와 처가 그리고 동학(同學)들의 수원 방문이 빈번했다. 이들에게 안내하는 첫 번째 여행지는 단연 화성 성곽이었고, 다음은 용주사였다. 우리가 세계사를 통해 공부했던 외국의 성곽에 비견할 만한 웅장함을 간직하고 있었고, 과학적으로 설계된 방어용 공심돈, 화홍문을 비롯하여 훈련용의 넓은 분지가 내방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새로운 도시를 꿈꾸며 장안문이라 이름 붙인 북문은, 그 위용 면에서 가장 크고 주변의 번화한 상점들이 어우러져 있는 수원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다.

 

3. 정음 문자를 사용한 문예부흥기

 

우리는 역사 이래로 국자(國字)로 중국의 한자를 빌려 쓰고 있었다. 우리의 생활이 담긴 말과 사건을 기록하려면, 한문(漢文) 문장으로 번역하여 기록해야 했다. 주지하다시피, 1446년 세종 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후에도 우리말 기록은 빈번하지 못하였고, 양반집 여성들이나 궁녀들이 사용하는 언문 형태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문화적인 변화는 사회·경제적인 면과 서로 맞물려 있다. 우리 역사에서 영·정조 시대를 근대의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 개인적 각성과 함께 자아의식이 발달하면서 개인적 가치를 내세우게 되었고, 상업 문화의 발달과 함께 사유 재산에 대한 관념이 확대되었다. 음악, 미술, 문학, 생활 문화 등 다방면에서 향유층이 중인, 서민층으로 확대되면서 대중문화가 꽃을 피웠다. 판소리, 탈놀이, 민요 등은 모두 우리말로 된 연희 장면들이다. 이를 기록하려면 자연스레 우리말을 적는 정음 문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기록과 출판 양면에서 정음 문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정조 대왕은 학문과 출판을 진흥시키기 위해 왕립 도서관이자 학술 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고 다양한 서적을 편찬·출판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는 서점과 방각소(坊刻所) 등이 운영되었고, 대중을 위한 상업적 출판이 성행하였다. 국문소설의 효시인 홍길동전과 영웅소설류, 가문소설, 그리고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등의 판소리 계열 소설들이 필사본이나 방각본 형태로 활발하게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4. 시조창 혹은 시조라는 정형 양식의 르네상스

 

대중문화의 확산은 앞에서 말한 상업 자본의 출현에 따른 출판문화의 발전 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영조 초기(1728)에 정음 문자로 기록된 가집(歌集)인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이 간행되었다. 이 가집은 애정, 풍류, 충의, 자연애, 현실 비판 등 다양한 주제와 함께 정악 시조와 사설시조, 잡가 등을 아우르고 있다. 청구영언은 우리의 구비(구전)문학을 기록한 책 중에서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출판물이다. 정조에 이르러서는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 그 이후로는 박효관, 안민영의 가곡원류(歌曲源流)등이 속속 간행되면서 시가(詩歌) 문학의 르네상스를 열었는데, 이때의 전통 음악은 두 세기를 넘긴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계승되고 있다.

특히 시조창은 정악과 문학으로 분리 독립되어 특징적인 예술 장르로 정착되었다. 앞의 청구영언에 수록된 가사(歌詞)들이 가창의 목적뿐만 아니라, ‘독서를 위한목적으로도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출판문학의 성격 또한 지니고 있다.

현대시조의 기틀을 마련한 가람 이병기의 고문수집에는 이 시기의 가집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시조 사랑과 교육적 의지에 따라, 시조창은 그 일부가 시() 문학의 형태로 분화·재탄생되어 오늘의 현대시조 문단을 형성하는 동인이 되었다.

 

5. 고전문학과 오늘의 문학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꽃은 앞의 문예 부흥기를 거치면서 간행된 것으로, 정음 문자로 기록된 서책 자료들이다. 일제강점기의 수난 중에 수집·보존되었다가, 국권 회복과 동시에 중요한 교육용 자료로 동원되었다. 1945년 국권의 회복과 동시에 국자(國字)한글을 채택하게 되었을 때, 민족적 자긍심과 함께 영·정조 시기에 정음 문자로 기록된 풍성한 자료들이 민족문화유산으로서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특히 한글 교육에서 이들 국문으로 된 문학적 자산들은 중요한 교육용 교재로 동원되었다.

·정조 시대는 인문 정신이 발흥하고 근대적 문화 예술의 맹아가 꿈틀거리던 문예부흥기였다. 또한 정신사적으로 실학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했던 시기였다.

 

1997년은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던 해이다. 그해에 필자는 직장을 따라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그렇지만 수원에서 두 딸이 영유아기를 보냈으니, 두 딸의 고향은 여전히 수원이다. 성시(城市)의 시민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언제나 즐겁다



글쓴이
주요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동아일보(1990, 시조)와 서울신문(1996, )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한밤의 우편취급소』 『오후의 시차』외.

평론집
『존재의 기척』 외.

수상

중앙시조대상, 노산시조문학상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