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박제가의 소나무를 보다
정조가 아버지의 사당인 경모궁(현 서울대 의대)을 찾았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사도세자의 사당을 참배하고 나와 주위를 둘러보던 정조는 멋진 소나무가 있는 집을 발견한다. 신하들을 이끌고 소나무가 있는 집을 찾은 정조는 깜짝 놀란다. 집주인이 검서관 박제가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박제가는 마당의 소나무를 ‘어애송’이라 부른다. “임금이 사랑한 소나무”란 뜻이다. ‘정유’란 호도 짓는다. 정유란 줄기가 곧고 잎이 무성한 소나무를 가리킨다. 박제가의 문집이 <정유각집>이 된 까닭이다. 호와 관련된 정조의 이야기가 또 있다. 규장각 초대 검서관이자 박제가의 절친인 이덕무의 유고집은 <아정유고>다. 정조가 이덕무의 때이른 죽음을 슬퍼하며 문집을 만들도록 내탕금 500냥을 내린다. 또한 정조는 이덕무와 친한 대신들에게 찬조를 권해 2,000냥이란 거금을 마련하여 <아정유고>를 만들고, 남은 돈은 유족들의 생활비로 사용하게 배려한다. 이덕무가 말년에 지은 호를 ‘아정(雅亭)’은 자신의 글을 읽은 정조가 '아(雅)'라고 높이 평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11살에 아버지를 잃다
정조 이산(1752~1800)과 정유 박제가(1750~1805)는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 지독한 책벌레였다. 글씨를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다. 성품과 재능도 닮았고 11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사실도 같다. 아버지의 죽음 후 두 소년이 모진 고난의 세월을 겪었다는 사실도 비슷하다. 서자로 태어난 박제가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와 청교동, 묵동 등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한편 정조는 임금이 될 세손이지만 정적들의 끊임없는 감시와 독살의 위협으로 밤을 지새며 독서할 정도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1776년 봄,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으로 즉위하여 새로운 정치를 펼친다. 한편 박제가는 1777년에 청나라와 조선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백탑파의 벗 유득공의 삼촌 유금이 박제가와 이덕무·유득공·이서구의 공동시집인 <사가시집>을 북경에 가져가 청나라의 선비들에게 보이고 서문을 받아온 것이다. 한해가 지난 1778년 박제가는 정사 채제공을 따라 꿈에 그리던 북경을 여행하고 귀국하여 <북학의>를 저술한다. 상공업을 중시하는 실학자를 “북학파”라 부르는데, 이는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나왔다. 1779년 30살의 박제가는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선발되어 정조를 만난다. 이들을 정조에게 추천한 사람은 누구일까? 박지원과 함께 백탑파를 이끌었으며, 세손시절 정조에게 학문을 가르쳐준 담헌 홍대용(1730~1784), 또는 정조의 최측근이었던 홍국영(1748~1781)이 아닐까 싶다.
박제가, 한류의 기원
1786년(병오년) 정월, 정조는 모든 신하들에게 나라에 도움되는 정책을 제안하라고 지시한다. 이때 박제가는 “지금이야말로 개혁해야 할 때”라며 과감한 결단을 촉구한다. 가난한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비결이라며 천주교 선교사를 초빙하여 양반 자식에게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르치고, 놀고 먹는 선비들에게 장사를 하도록 권장하며, 당장 청나라와 무역을 해야한다고 제안한다. 정조는 박제가의 개혁에 대한 열망, 이를 뒷받침할 풍부한 지식, 청나라 지식인과의 폭 넓은 인맥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머뭇거린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790년 정조는 박제가에게 정3품 군기시정의 벼슬를 내려 북경 사절단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서얼 신분인 박제가에게 임시지만 차관급인 당상관의 벼슬을 내린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이었다.
1790년 당시 박제가는 청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인이었다. 이전 역사를 살펴도 박제가와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은 신라의 유학생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최치원 정도다. 18세기 후반 북경 유리창의 스타였던 박제가의 활동 범위는 우리의 상상을 벗어난다. 청나라 지식인들은 조선에서 온 박제가의 툭트인 생각과 배어난 재주에 매료되었다. 조선인 중에서 박제가만큼 중국의 많은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사람은 찾기 어렵다. 박제가가 청나라 지식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호저집>에 실린 사람이 172명이나 된다. 정조도 박제가가 청나라 예부상서 기윤(1724~1805)을 비롯한 최고의 학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기윤은 <사고전서>의 편찬 책임자로 조선에도 널리 알려진 탁월한 학자였다. 조선의 고위 관료들은 박제가를 ‘당괴(唐魁)’라 부르며 시기하고 미워했다. 당괴란 청나라 문화를 수용하는데 앞장서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못단 핀 꽃
1800년 봄, 영평현령 박제가는 정약용(1762~1836)과 함께 조선 종두법 시술에 성공하여 수 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구해낸다. 조선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그해 여름 정조의 죽음으로 상황은 급변한다. 박제가와 정약용이 유배를 떠나게 되면서 종두 시술도 멈추었다. 1801년 2월 천주교도 혐의로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던 정약용은 같은 해 11월 황사영 백서로 다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 사이인 1801년 9월, 한양의 동남 성문에 대비 정순왕후와 심환지를 비방하는 벽보가 나붙었는데 박제가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심한 고문을 당한 후 압록강이 가까운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를 살았다.
임금이자 스승으로 자신을 규정한 정조는 탁월한 갈등 조정자였다. 1797년 봄날 화성행궁에서 박제가는 노론 정승 심환지와 한판 붙었다. 의자에 앉아 행사를 참관하는 박제가의 모습을 본 심환지가 다가가 품계가 낮아 의자에 앉을 자격이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박제가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심환지가 정조에게 달려간다. “전하, 박제가를 파직하소서.” 사연을 들은 정조가 대신을 타이른다.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니, 앞으로 이런 폐단이 없게 하라.”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지원으로 영의정에 오른 심환지는 개혁적인 남인 인사들과 서얼 출신의 관료들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선다. 신유사옥을 일으키고 장용영을 해체하여 개혁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영조와 정조대를 거치며 형성된 인적 물적 기반이 불과 4년만에 거들난다. 조선의 정치는 회복하기 어려울만큼 크게 후퇴한다.
유배지로 향하는 길에서 박제가는 옛날을 회상한다. “선왕께서는 나를 왕안석이라 하셨지,” 정조는 박제가를 중국 송나라의 유명한 개혁가인 왕안석에 비유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정조와 박제가는 부강하고 풍요로운 나라를 꿈꾸었다. 만약 박제가가 1786년에 제시한 개혁 방안을 정조가 수용했다면 조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정조와 박제가, 두 사람의 아름다운 만남에 감동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글쓴이 : 김영호
「무예도보통지」 등
■ 공저
「조선후기 군사개혁과 장용영」
「수원을 아시나요」
「수원의 르네상스를 이끈 사람들」
「조선의 무예서와 도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