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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에세이

[정수자 칼럼 2025] 누군가 울고 있다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5-08-28
조회수
219



누군가 울고 있다훅 치고 들어오는 문장이다. “지금 어디선가라는 구절을 앞에 놓아보면 더 그렇다.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어떤 울음이든 그 안팎의 소리그늘이 길게 짚인다. 누군가의 우는 모습에서 울음의 정도며 사정까지 기울여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존재의 본질이며 고독의 울림을 깨우는 문장의 힘이 커서 그동안 많이 빌려 썼지 싶다.

 

그런데 이 문장은 좀 다른 번역도 있어 다시 보게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엄숙한 시간인데 1연만 봐도 세상 어디선가 지금 울고 있는 사람은/세상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나를 보고 우는 것이다로 나오니 많이 다른 느낌이다. 아무튼 누군가 번역을 조금 달리한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는 문장은 확연히 다른 울림을 지닌다. 어찌 보면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라는 불확정성에 마음이 많이 쓰이는 것도 같다. 그런 점에서 주위를 더 돌아보게 하는 마음을 얻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지금 울고 있는 사람은마음을 온전히 퍼내는 것. 들어차는 울음을 가누지 못 해 눈물이 터질 때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의 맨얼굴을 어딘가에 고하는 듯하다. 마치 제의를 치르듯, 상한 마음을 풀어내듯, 꿍쳐둔 울음을 꺼내어 외피를 벗고 마음의 골골을 씻어내는 것 같다. 그렇게 울 줄 아는 짐승인 사람으로서의 울음은 고해가 되기도 한다. 어떤 울음이 자신의 정화만 아니라 존재의 노릇을 확장하는 데도 힘을 얹듯. 자신의 울음을 넘어 타인의 울음에 함께하는 행위로서의 울음은 그래서 울 줄 아는 짐승의 어깨에 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래서 둘러보면 지금 울고 있는존재는 아주 많다. 요즘 우리 곁의 울음으로는 가을의 전령이라는 풀벌레소리가 높다. 폭염 끝에 맞는 가을 초입의 반가운 울음 손님. 그것은 자연의 소리건만 울음이란 표현을 써와서 우리는 예사로 풀벌레 울음을 붙여 쓴다. 물기 걷힌 초가을 대기를 흔드는 풀벌레소리는 더 낭랑하니 노래가 어울리련만, 사람의 감정을 얹어 울음으로 써왔던 것이겠다. 그러고 보면 벌레만 아니라 새들에게도 운다고 써왔다. 이는 눈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심(詩心)의 영향일까. 아니면 약소국 민족의 그늘이 노래보다 울음에 길게 투영된 것일까. 상가에 가서 유독 크게 우는 사람도 제 설움에 서럽게 운다니 말이다.

 

이참에 울음을 조금 넓혀보면, 약자 혹은 패자의 표현으로 눈물을 많이 활용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아서 울면 지는 거야라는 전언이 사회적으로 통용된다. 드라마나 영화의 상투적 표현이 그러하듯. 하지만 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울 수밖에 없는 약자가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래서 좋은 정치란 곧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너도나도 약자 돌봄을 앞세우는 것이리라. 하지만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의 행위다. 을묘년 행차 때 정조가 행한 신풍루 사미(賜米)’양로연등도 어려운 사람들의 눈물을 살피고 닦아주는 선정의 사례로 꼽히듯 말이다.


현실적으로 눈물을 닦아주려면 사실 그 원인을 없애야 가능하겠다. 하지만 마음을 다친 눈물이라면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도 위안이나 치유가 된다. ‘쓰는 사람들은 그런저런 울음의 대변이나 번역의 소임을 안고 왔다. 세상의 눈물을 대신해 울어주는 곡비(哭婢)가 오랫동안 자임해온 시인의 노릇이었듯. 천지간에 숨죽인 눈물이나 엎드린 울음에 깊이 기울이면서 곡진한 울음을 담아내고 울림을 전하는 것이다.

 

울음을 톺다 보니 말갛게 닿는 소리들이 한층 미쁘다. 매미나 철써기나 귀뚜라미나, 세상에 와서 제 노릇 다하고 가는 숨탄것들의 몸짓이 아름답다. 그게 울음이든 노래든 구애든, 제 삶에 대한 헌사 같으니 말이다.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는가. 그 울음을 찾아 어깨에 기대라는 듯, 건들바람이 툭툭 치고 간다.



글쓴이

주요약력

(재)정조인문예술재단 이사. 1984년 세종숭모제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등단. 시조시인.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시집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 『파도의 일과』『그을린 입술』『비의 후문』『탐하다』『허공 우물』『저녁의 뒷모습』『저물녘 길을 떠나다』 등.

연구서
『한국 현대시의 고전적 미의식 연구』 외에 공저 『한국 현대 시인론』, 『올해의 좋은 시조』 등.

수상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