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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 2025] 박제가와 정약용, 마마를 물리치다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5-08-29
조회수
146



1990년대 비디오를 틀면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라는 경고성 발언이 흘러나왔다. 옛사람들이 호랑이만큼이나 무서워했다는 마마는 천연두의 다른 이름이다. 어린이가 천연두를 앓으면 열에 서넛이 죽었을 뿐 아니라 살아도 얼굴에 흉터가 남았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 초상화에서도 마마의 흉터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1880년에 지석영이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와 우리나라에 보급했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보다 80년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서 종두법이 시작되었다.


두 지식인의 위대한 실천

1800년 이른 봄, 박제가와 정약용이 두물머리에서 만났다. 영평[현 포천] 현령으로 재직하고 있던 박제가가 마현 고향집에 있는 정약용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박제가는 1750년생, 정약용은 1762년생으로 두 사람은 띠동갑이다. 규장각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정조의 명을 받아 책을 편찬하며 서로 친해졌다. 박제가는 자신의 아끼는 시집을 빌려줄 정도로 정약용을 신뢰하고 좋아했다. 형조참의로 재직하던 정약용은 노론 벽파가 천주교 신자들이 많은 남인을 역적이라며 공격하자 불안을 느껴 사직하고 마재 고향집에서 지내며 당호를 여유당이라 짓고 의학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1798년 말부터 1799년 초까지 중국에서 전해진 전염병으로 서울에서 무려 6만 명이나 사망하는 재앙이 일어났다. 즉위 초부터 정조를 보좌하던 정승 김종수와 채제공까지 사망하여 정국이 매우 불안한 때였다. 마마 자국으로 눈썹이 세 갈래가 돼 호를 삼미자라 지었던 정약용은 자녀 아홉 중에서 여섯을 천연두로 잃은 아픔을 가졌기에 마과회통을 저술할 정도로 의학에 밝았다. 이날 정약용은 박제가에게 종두방(種痘方)’이라는 청나라 천연두 의서를 읽고 있음을 들려주며 자신이 터득한 의학 지식을 알려준다. “천연두 환자 고름딱지를 처리해 그 즙을 코에 넣으면 치료가 된다고 합니다.” 몇 쪽이 떨어져 나간 책을 소개하는 후배의 말을 들은 선배가 활짝 웃으며 화답한다. “나에게도 이와 비슷한 책이 있소.”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마마 퇴치에 힘을 모으기로 결의한다. 영평 관아에 돌아간 박제가는 바로 책을 보낸다. 정약용은 자신이 보던 책과 선배가 보내준 책을 합치고 주석을 붙여 완성한 책을 영평 관아로 보낸다. 책을 읽은 박제가는 두종에 관한 최신의 정보가 빠졌음을 알려준다. “여름과 겨울의 유효기간이 다르다네.” 박제가는 정약용이 정리한 책을 읽고 인두법(人痘法)’을 완전히 터득한다. 직접 종두를 시술하기로 결심한 박제가는 북경에서 들여온 종두[백신] 하나를 구해 놓고 시술할 대상자를 찾는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영평 관아의 이방이 나서서 자신의 아이에게 접종시켜 달라고 부탁한다. 이 접종에 성공하자 관아에서 일하는 종도 나선다. “소인의 아이에게도 접종시켜 주십시오.” 박제가는 누나의 아들인 조카에게도 종두를 접종하여 성공한다. 접종을 거듭하면서 종두가 좋아졌다. 박제가는 이 기쁜 소식을 정약용에게 전했다.


숨겨진 역사

한편 박제가는 친밀하게 지내던 포천 의사 이종인에게 임상실험을 마친 종두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며 부탁한다. “한양으로 가서 널리 시술하면 좋겠소.” 박제가의 당부를 받은 이종인은 한양의 수많은 아이를 살려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정조가 서거한다. 11살의 순조가 왕위에 올랐으나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가 노론 벽파를 중용하면서 조정은 힘의 균형을 잃게 된다. 1801년 봄,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신유사옥으로 정약용은 천주교도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경상도 장기로 유배된다. 가을에는 박제가도 정순왕후와 영의정 심환지를 비방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최북단인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되고,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다시 수사를 받은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다. 의사 이종인까지 천주교인으로 몰려 투옥되면서 천연두 백신인 종두가 끊어졌다.

그러나 종두법 기술은 단절되지 않았다. 1807년 정약용은 강진에서 반가운 소문을 듣는다. “상주에 있는 의원이 종두를 접종하는데 100명이 접종해 100명이 완치돼 큰 이익을 얻었다.” 한편 포천에서 박제가와 협업했던 의사 이종인은 유배에서 풀려나 <시종통편(時種通編)>이라는 의서를 저술해 인두법을 보급한다.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이 지은 백과전서 <오주연문장전산고> ‘종두변증설도 박제가의 종두법이 포천의 의사 이종인을 통해 경상도로 전해진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정조가 갑자기 운명하지 않았더라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종두법은 팔도로 널리 보급되고 기술도 한층 발전했을 것이 틀림없다. 만약 그랬다면 박제가와 정약용은 우리에게 의학자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알려진 것처럼 정조는 <제중신편><수민묘전>이라는 의서를 편찬할 만큼 의학에 밝았으며, 수원화성을 찾을 때도 가마를 타지 않고 말을 탔을 정도로 강건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여 밤샘하고도 다음 날 업무를 보는데 별 탈이 없었으며, 활쏘기 실력도 타고나 50발을 연속으로 쏘아 과녁에 명중시킬 만큼 체력과 집중력이 뛰어났다. 평소 이런 모습을 보였던 까닭에 정약용은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정조의 때 이른 죽음으로 종두법의 보급은 물론 우리 역사까지 크게 후퇴시켰다. 박제가와 정약용을 우리가 주목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글쓴이 : 김영호

■ 주요경력
현) (재)정조인문예술재단 이사
    한국병학연구소 소장

전) 가야산무예학교
    (사)무예24기보존회 대표
  
■ 주요저서
「수원화성과 24반무예」
「조선의 협객 백동수」

「무예도보통지」 등  


■ 공저

「조선후기 군사개혁과 장용영」

「수원을 아시나요」

「수원의 르네상스를 이끈 사람들」

「조선의 무예서와 도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