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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에세이

[김효숙 칼럼 2025] 시인의 특별한 열정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5-09-16
조회수
100


시인은 실제든 환상이든 어떤 열정을 살아간다. 그런데 열정의 원천인 언어가 급격히 힘이 빠져버린 것처럼 전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시인의 노화, 다시 말하면 시의 노화는 일어나선 안 될 일처럼 여겨진다. 올드보이가 되었어도 이 현상을 거부하며 문청 시절에 인정받았던 가치들을 이후 세대가 그대로 받아 안아 지켜주기를 고대하는 시인이 있는 건 여기에 연유한다.

 

늦여름에 행궁동 책고집에서 열린 44색 북 토크 글 쓰는 여자들의 후감(後感)을 더러 나누고 싶다. 두 시간에 걸쳐 시인 네 분과 시집 또는 산문집을 놓고 대담이 오갔는데, 체감 시간이 무척 빨라서 내심 놀랐다. 네 분에게 분배한 시간의 총량이 짧은 이유도 있겠고, 북 토크의 재미와 의미도 모름지기 한몫했을 것이나, 북 토크 후의 반응은 교차했다. 청중의 몰입도가 높고, 시를 읽는 데 해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면서 다른 북 토크와의 차별화가 좋았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또 다른 이는 시 장르와 거리가 먼 청중에게는 북 토크의 깊이가 도리어 전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일 수 있다고 귀띔을 해줬다.

 

이 같은 반응들이 잉여의 표현으로 들리지 않고 적절해 보였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앎의 감각을 형상화하는 글쓰기 주체에게 장르 간 경계란 것은 사실상 엄정히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것. 산문 같은 시, 시 같은 산문들이 생산되는 이즈음의 문단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시적 기법인 알레고리 효과로 과감하게 새로운 소설을 써낸 연한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의 일이다. 소설 요한시집(장용학)만 떠올려봐도 감이 온다. 그러니 시와 소설의 변별 지점은 어떤 면에서 단지 형식의 차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네 분 중 한 분의 시집에서는 소설을 상호 텍스트로 삼아 인물을 변용한 점이 눈에 띄었다. 다른 세 분의 답변을 들어 보아도 독서의 깊이와 시 깊이의 연관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시 한 편을 쓰기 위하여 투여한 열정을 네 분의 독서 성향에서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이미 구성된 견고한 세계에 대한 해방 감각을 시로 산문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이 순환하므로 부지런한 시인만이 이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 책 속에 무수한 질문과 길이 있다는 말은 이미 오래전에 고전이 되었다. 독서량이 풍부할수록 질문이 많아지는 이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동일성을 꾀하는 이데올로기만이 질문을 허용하지 않고 답을 하나로 통합한다.

 

최근의 북 토크 현상은 독자를 향한 신선한 다가감의 보폭을 지녔다. 시인이 시집을 낸 후 시집을 떠나버리는 절차를 거슬러 시인을 다시 텍스트 안으로 초대하여 시 이야기를 듣는 일을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으로 아는 청중이 빈자리를 채운다. 텍스트의 내부와 외부로 문학의 공간을 넓혀 문학 안에 머무는 시간을 온전히 누려 본 청중은 알 것이다. 시인은 새로운 세계에 가닿고자 하는 열정을 동력으로 읽고 쓴다는 것을.

 

문학보다 이루기 쉬운 야망이 있음에도 시인이 읽고 쓰는 것은 그 야망이 대중에게 평준화되어 있어서, 평준화로는 도달하지 못할 세계를 시인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새로운 언어에 목말라 하며, 고통 속에서도 그 과정을 즐기며, 내화한 언어 속으로 자신의 열정이 녹아드는 삶을 원한다. 어쩌면 그는 열정 그 자체가 아니라 열정의 혼돈에 자신을 맡겼을지도 모른다.

 

나이 30대부터 늙음을 말한 김수영의 특별한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말 무서운 나이와 시는/동그랗게 되어 가는 나이와 시/사전을 보며 쓰는 나이와 시(김수영, )라고 한 그의 언술에서는 나이와 시언어의 관계, 예각이 마모되며 둥글어지는 언어 감각, 사전의 정의를 복제하는 시언어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읽힌다. 이 싯귀가 소진 일로에 놓인 열정의 메타포로 읽히면서, 나이 듦의 현상을 강박적으로 시 쓰기의 장애로 여기고 있다는 감을 안긴다. 나이 듦에 대한 염려로 지레 노쇠해진 것처럼 보이는 김수영 시인은, 열정이 쇠퇴하면서 언어도 무뎌지는 증상을 무서워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 지나간다



글쓴이


주요약력

2017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으로 평론 활동 시작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 시인의 거울 : 시의성들(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