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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 2025] 정조의 봄날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5-03-24
조회수
107



풍경1

누군가 내게 봄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말한다. “창덕궁 후원이지요.” 연둣빛으로 물드는 숲길을 지나 창덕궁 후원(後苑)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기억이 아직 또렷하다. 규장각 우뚝한 지붕과 부용지의 푸른 연못이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춘향이의 애인 이몽룡도 과거 시험 때 구경했다던 춘당대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춘당대는 과거에서 등수를 나누는 마지막 시험인 전시를 보는 시험장으로 쓰였기에 조선의 무사와 선비들에게 꿈의 무대였다.

<정조실록>을 함께 읽었던 문우들과 후원으로 소풍을 갔던 어느 해 봄날의 행복했던 풍경도 떠오른다. 그때 나는 춘당대 영화당 앞에 서서 200여 년 전 조선을 새롭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정조의 이상과 꿈을 이야기했다.

이곳 춘당대 영화당은 문무(文武)가 어울리던 공간입니다. 문신들에게는 활쏘기를, 무신들에게는 독서하기를 권했던 정조는 종종 규장각 각신과 장용영 장관들을 짝 지워 함께 활을 쏘게 했지요. 북벌을 준비했던 효종이 이곳에서 말을 달리며 언월도를 휘둘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요. 정조를 호위하던 무사들이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마상재나 본국검 같은 무예를 연마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풍경2

1776, 조선 22대 임금으로 즉위한 25살의 청년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한다. 알려진 것처럼 규장각은 문예 부흥과 개혁 정책의 산실이다. 정조가 규장각으로 오르는 문 이름을 어수문(魚水門)’이라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물은 임금 정조이고 물고기는 신하들이다. 어수문이란 이름에도 임금과 신하 사이의 화합과 의리를 중요시했던 정조의 생각이 들어있다. 부용지 돌에 조각된 잉어를 살펴보며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약했던 이덕무와 박제가, 이들과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장용영 장관 백동수를 떠올린다.

후원은 특별한 날 몇몇 사람에게만 개방되었다. 왕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라 고관대작도 왕의 허락 없이는 출입할 수 없었기에 금원(禁苑)”으로 불리던 곳이 아닌가. 그러나 정조는 신하들을 후원에 자주 초대한다. 1788년 봄, 후원에서 신하들과 매화꽃을 감상하던 정조가 곁에 있던 신하에게 들려준 말에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느껴진다. “한 줄기 돋아나는 새싹이 그지없이 사랑스럽다. 정자(程子)버들을 꺾지 말라는 말이 참으로 좋으니 정말 마음에 와닿는다.”

이날 정조는 책을 교정하고 펴내느라 수고하는 신하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마련했다. 꽃이 활짝 핀 후원에서 마련된 특별한 잔치에 신하들도 들떠있었다. 마당에 술 단지가 놓이고 지붕에는 햇볕을 가리는 차일이 쳐졌다. 선인(膳人:식사 담당)이 안주로 삼을 고기를 굽기 위해 화로에 숯불을 피웠다. 벌겋게 피어오른 화로를 뜰에 놓았을 때 정조가 급히 선인을 불렀다.

빨리 그것을 옮기라. 새싹이 이제 막 푸릇푸릇 올라오는데 어떻게 차마 불꽃 속에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는가.”

마당에 돋아나는 풀의 생명도 살리려는 임금의 마음은 잔치에 참석했던 신하의 기록을 통해 주위에 알려졌다.

 

풍경3

재위 19(1795) 3, 정조는 신하들과 창덕궁 후원을 거닐며 봄꽃을 감상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다시 산책에 나선 정조는 규장각 앞 연못 부용지에서 신하들과 낚시를 드리우고 물고기를 낚았다. 시간이 흘러 날이 어두워지자, 정조는 자신이 낚은 물고기를 풀어주고 신하들을 둘러보며 방생(放生)하라고 하였다.

옛사람의 시에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껏 즐기는 뜻을 취하는 것이지 물고기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취적비취어取適非取魚]’하였으니, 또한 이런 뜻이다.”

정조가 말한 옛사람은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 715~770)을 말한다. 잠삼의 시 어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상 사람들 어찌 그 깊은 뜻 알랴[세인나득식심의·世人那得識深意],

이 노인은 유유자적할 뿐, 물고기 낚는 것 아님을[차옹취적비취어·此翁取適非取魚].”

이 자리에 참석했던 다산 정약용이 훗날 정조를 그리워하며 부용정시연기(芙蓉亭侍宴記)’라는 글을 남겼다.

금상께서 등극하신 지 19년째 되는 해 봄에 상께서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때 나는 규영부(규장각) 찬서로 있었는데, 글을 짓느라 수고했다 하여 상께서 특별히 연회에 참석할 것을 명하였다. 부용정에 이르러 상께서는 물가의 난간에 임하여 낚싯대를 드리웠다. 여러 신하들도 연못 주위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아서 통 안에 넣었다가는 모두 다시 놓아주었다.

 

 

풍경4

1793(정조 17) 늦은 봄에 규장각 각신을 비롯한 여러 신하의 자제와 재야의 선비들을 후원에 초대하였는데, 모두 42명이나 되었다. 이날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난감해하던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정조에게 날짜를 연기할 것을 청하자, 정조가 이렇게 말했다.

좋은 날 성대한 모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임금의 결정에 따라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신하와 선비들은 왕이 탄 보여(步輿)를 따라 걸어 후원의 뒤편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에 올랐다. 정조는 관리를 시켜 천막을 치고 자리를 깔아 초대한 손님들을 앉게 하고 부엌을 옮겨 술과 음식을 베풀었다. 그리고 사람에게 먹과 종이를 나눠주고 시를 지어 올리도록 했다. 비를 얻어 후원의 풍경은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선비가 이렇게 회상했다. “꽃향기는 코끝을 찌르고 곡수(曲水)는 졸졸 흘렀다. 여러 신하가 모두 한껏 마시고 즐거움을 다한 뒤에 파하였다.”

정조의 말처럼 좋은 날, 좋은 때는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법이다. 봄날은 짧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올봄에는 주말에는 산과 들을 찾아 나서자. 봄이 한창 머물러 있을 때 창덕궁 후원을 찾으면 금상첨화이겠다.

 




글쓴이 : 김영호


■ 주요경력

현) (재)정조인문예술재단 이사
    한국병학연구소 소장

전) 가야산무예학교
    (사)무예24기보존회 대표
    
■ 주요저서

「수원화성과 24반무예」
「조선의 협객 백동수」

「무예도보통지」 등  


■ 공저


「조선후기 군사개혁과 장용영」

「수원을 아시나요」

「수원의 르네상스를 이끈 사람들」

「조선의 무예서와 도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