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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자 칼럼 2025] 어쩌면 지금이 화양연화

작성자
정조인문예술재단
작성일
2025-04-07
조회수
187




고금의 아름다운 것을 (화성에) 모두 갖추라볼수록 아름다운 정조의 명령이다. 이 구절의 원문은 누조오성지지제역위상확강구비고금미제함비 漏槽五星池之制亦爲商確講究비古今美制咸備). 각별한 어명의 위엄은 봄날의 화성 안팎을 걷다 보면 더 환히 만나게 된다.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화성과 더불어 사는 우리네 삶에도 문화 예술적 아름다움을 다채롭게 비춰주기 때문이다.

 

특히 고금의 아름다움은 봄꽃과 사람 꽃이 한껏 피어날 때 더 빛난다. 화성의 화양연화(年華)라고 할까. 한복 곱게 차려입은 청춘남녀들이 고전미 그윽한 성곽이나 행궁 안팎을 거니는 모습을 보면 화양연화의 장면들만 같은 것이다. 그렇듯 행궁 주변이 행리단길로 소문나며 확 늘어난 방문의 꽃을 피울 동안, 정작 골목에는 속으로 곪는 문제들이 있었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이른바 핫 플레이스들이 겪는 지금도 진행 중인 난제다. 고금미제의 실현보다 어려운 자본의 문제가 속속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화양연화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건축물에게는 화양연화가 아주 길다. 탁월한 건축물일수록 그곳의 상징으로 아름답게 피어났으니 말이다. 동서고금의 아름다운 건축물은 설립 직후부터 내내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모으면서 그 안팎의 삶과 문화도 빛나게 했다. 그런데 세계의 추앙을 받는 경이로운 건축물 중에는 인명을 파묻으며 꽃피운 것도 꽤 있다. 그런 흑역사 서린 고대 중세 건축물과 달리 화성에는 인부들의 노고를 세세히 살피고 아픈 사람에게 약까지 내린 임금의 사랑이 담겨 있다. 정조의 위민정신이 공허한 수사가 아니라 오늘날도 이어나갈 여민사상으로 되새기는 까닭이다.

 

그래서 다시 보면, 정조에게도 화성축성 시절은 화양연화가 아니었을까. 그토록 바라던 아버지의 묘를 화산으로 옮기고 마음껏 찾은 것은 물론 아버지와 동갑인 어머니 회갑연도 행궁에서 잔치를 크게 열었으니 말이다. 왕의 자리에서도 구해온 효의 구체적 실현도 아름답지만, 인간 이산의 원대한 꿈과 한을 동시에 풀었을 터. 그런 효심과 아름다움 추구에 따른 정조의 덕을 크게 입은 화성유수부 또한 그즈음이 화양연화였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정신을 오늘에 맞게 살리면서 화성의 화양연화를 날로 새로 만들어가고 있지만.

 

주지하다시피, 정조는 문무겸비 학예군주로 정평이 난 왕이다. 나아가 뛰어난 미적 감각의 보유자로 문화 예술 전반의 완성도를 견인하며 당대의 예술성 고취에도 큰 힘을 실었다. 그런 정신의 표현인 정조의 말 또한 어록으로 톺아볼 만큼 수준 높은 내용과 품격을 지녔다. 그런데 지도자로 불리는 이즈음 사람들의 말은 듣기가 괴로울 지경이다. 인문적 교양이며 생각의 수준은 따져볼 새도 없이 문장조차 안 되는 말을 함부로 마구 던진다. 논리도 근거도 없는 우격다짐을 막무가내로 퍼붓기 일쑤인 것이다. 말의 내용이나 함량보다 상대방 비수 꽂기로 피 튀기는 막말 대잔치의 연속이다. 명언까지는 아니라도 내용이 좋아 새기고 남길 만한 말은 언제나 볼 수 있을까.

 

고금미제의 아름다움. 그런 추구는 비단 예술가만의 일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평소의 말과 글에서도 고민하고 추구할 가치다. 글에 한정해 봐도, 어떤 미사려구(美辭麗句)보다 똑바른 단어들로 전하려는 내용을 또렷이 쓸 때 문장의 아름다움에 다가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번 헌재의 탄핵 파면 결정문을 새겨본 소회들이 그 예를 인증한다. 더 이상 빼거나 넣을 것 없는 문장들로 완성도를 구하다 보면, 그 속에서 자기만의 문체라는 문장의 화양연화도 만날 게다.

 

그렇게 보면, 화양연화는 지나간 꽃시절의 소환에 그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더 높은 아름다움을 찾아 나아가면 화양연화 또한 지연될 테니 말이다. 그러매, 화성과 함께 고금의 아름다움을 날로 새로 찾는 우리는 어쩌면 계속 화양연화일지도!

 




글쓴이

주요약력

(재)정조인문예술재단 이사. 1984년 세종숭모제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등단. 시조시인.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시집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 『파도의 일과』『그을린 입술』『비의 후문』『탐하다』『허공 우물』『저녁의 뒷모습』『저물녘 길을 떠나다』 등.

연구서
『한국 현대시의 고전적 미의식 연구』 외에 공저 『한국 현대 시인론』, 『올해의 좋은 시조』 등.

수상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