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祖代 御眞과 신하초상의 제작
저자유재빈
발행연도2020
발행처한국미술사학회
正祖(재위 1776~1800)는 10년마다 자신의 어진을 제작한 영조의 전례에 따라 1781년과 1791년 어진제작을 명하였다. 이처럼 왕이 재위시 자신의 초상을 제작한 전통은 世宗이후 사라졌다가 肅宗代에 부활한후 英祖에 의해 계승된 것이었다. 현임 왕의 어진은 죽은 先朝의 어진과는 달리 왕실 제향의 대상이 아니라신하들의 경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어진은 다시 현재의 군신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조대에는 어진에 대한 전통은 부흥하지만 공신도상은 그려지지 않아서 초상 제작이 불균형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하초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정조의 어진 제작 사례는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조는 어진의 제작과 봉안을 모두 奎章閣에서 맡아 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규장각 원내는 어진도사가 이루어지는 장이 되었으며, 규장각 각신들은 왕실의 성역에 참여하는 공신이 되었다. 어진이 완성된 후규장각은 어진과 규장각신의 초상이 함께 봉안된 곳이었으며, 어진이 규장각신의 의례를 받으며 정기적으로봉심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규장각은 어진을 통해 위상이 강화되었고, 어진은 규장각을 통해 현재군신관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정조의 어진이 현재적 영향력을 갖는 또 다른 지점은 신하들로부터 받는 ‘瞻望’과 ‘瞻拜’이다. 어진은제작 기간 동안 첨망을 통해 군신 관계에 대한 담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완성된 어진에게는 절하는 의식이포함된 첨배를 행하게 하였는데, 봉안 의례를 통해 정조의 초상화는 어진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며, 정기적인봉심 의례를 통해 국왕이 규장각에 현현하는 것을 재현할 수 있었다. 정조의 어진 도사는 왕의 초상만이 아니라 신하 초상을 위한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초상을 통한 군신관계의 논의를 확대하였다. 어진을 논하는 같은 자리에서 신하 초상이 열람되었으며, 어진을 제작한 화사에의해 참여 신하들의 초상이 제작되었다. 신하 초상이 열람된 명목은 어진 제작에 참고하기 위함이었고, 신하 초상의 제작은 공로에 대한 포상의 성격을 띠었지만 실제적인 효과는 이를 넘어섰다. 정조는 신하 초상을회유와 견제의 방편으로 사용하였고, 이는 적극적으로 신하의 응답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1791년 어진 도사후 그려진 蔡濟恭의 초상화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규장각이 어진과 신하 초상이 공존하는 정치적 공간이었다면 어진도사는 이들이 의례적 맥락에서 보여질 수 있게 한 계기였다. 결국 규장각에서의 어진도사를 통해 정조의 조정에서 초상화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기념물에서 나아가 현재의 군신관계를 정립하는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